[더팩트ㅣ강신우 기자] 한국 영화 시장에 달라진 공기가 감지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던 극장가, 특히 지난해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말이 반복됐던 흐름과 비교하면 올해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극장을 찾아달라고 호소하던 배우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던 지난해와 달리, 2026년 극장가는 '반등'이라는 단어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2025년 한국 영화 시장은 명확히 침체의 한복판이었다. 천만 영화는 단 한 편도 나오지 않았고, 한국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인 '좀비딸'(감독 필감성)만이 500만 관객을 간신히 넘었다. 전체 관객 수는 전년보다 줄었고, 극장 폐점 소식까지 이어지며 산업 전반의 위기감이 커졌다. 특히 검증된 외화와 애니메이션이 강세를 보이는 동안 한국 영화는 국내 극장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다만 아직 상반기가 채 지나지 않은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가장 먼저 지난해 12월 31일 개봉한 '만약에 우리'(감독 김도영)가 오랜만에 흥행에 성공한 멜로 영화가 됐다. '만약에 우리'는 개봉 13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110만 명을 돌파했고, 총 24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의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여기에 2월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는 극장가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왕과 사는 남자'는 누적 관객 수 1689만 명을 기록하며 '극한직업'(1626만 명)과 '신과함께-죄와 벌'(1441만 명)을 제치고 역대 영화 흥행 2위에 올랐다. 매출액은 1630억 원으로 역대 1위를 기록하며 올해 박스오피스를 압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왕과 사는 남자'의 대흥행만으로 한국 영화가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라는 시각도 많았다. 코로나19 이후 '범죄도시2' '서울의 봄' '파묘' 등 극장가에 몇 차례 대형 흥행작이 나오긴 했지만, 시장 전체의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 편의 흥행이 곧 산업 전반의 회복을 뜻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중론 속에서 '살목지'(감독 이상민)가 조용히 힘을 발휘했다. 4월 8일 스크린에 걸린 '살목지'는 개봉 7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80만 명을 돌파하며 2026년 최단기간 손익분기점 돌파 기록을 썼다. 360도 파노라마 카메라 등을 활용한 독창적인 연출이 만드는 체험형 공포는 입소문으로 이어졌고, 실제 촬영지를 찾는 관객도 늘어나며 '살리단길'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결국 '살목지'는 개봉 40일째 누적 관객 수 315만 명을 기록하며 2003년 '장화, 홍련'을 넘어섰고, 23년 만에 한국 공포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새로 썼다. 특히 이는 제작비 30억 원의 중저예산 공포 영화가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대형 블록버스터가 아니어도 확실한 콘셉트와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관객은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살목지'의 충격도 잠시, '군체' 역시 빠르게 흥행 소식을 전하며 그 뒤를 이었다. 지난 5월 21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좀비물 '군체'는 첫날 20만 명을 동원하며 올해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새로 썼고, 개봉 4일 만에 100만 명, 10일 만에 300만 명 고지를 밟으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여기에 14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 '왕과 사는 남자'보다 빠른 흥행 질주를 이어가며 향후 성적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군체'의 흥행은 올해 한국 영화의 반등 흐름이 특정 장르나 한 작품에만 기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반갑다. 멜로부터 사극, 공포, 서스펜스 액션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관객을 만났고,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작품이 극장에서 봐야 할 명확한 이유를 제시한다면 관객은 여전히 응답한다는 긍정적인 신호다.
여기에 '휴민트'(감독 류승완)와 '신의악단'(감독 김형협)까지 100만 관객을 넘기며 한국 영화 라인업에 힘을 보탰고 '프로젝트 헤일메리' '슈퍼 마리오 갤럭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등 외화의 선전도 극장가 회복에 힘을 더했다.
물론 아직 낙관만 하기에는 이르다. 코로나19 이후 관객들의 관람 습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티켓값 부담과 OTT 유행 속에서 관객들은 여전히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인가"를 따진다. 초반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빠르게 밀려나는 흥행 양극화도 여전하다. 올해 좋은 기록이 곧바로 시장 전체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올해 한국 영화의 초반 흐름은 분명 고무적이다. 특히 '왕과 사는 남자'가 만든 온기가 단발성 흥행으로 끝나지 않고, 장르 영화들이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확정된 하반기 라인업도 기대를 더한다. 많은 평론가의 호평을 받은 코미디 영화 '와일드 씽'(감독 손재곤)이 당장 6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를 비롯해 '암살자(들)'(감독 허진호) 등도 공개 시기를 조율 중이다.
'호프'는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 등 국내 배우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마이클 패스벤더, 테일러 러셀 등 글로벌 배우들이 합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기대를 모았다. 지난 5월 17일 제79회 칸영화제에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월드 프리미어 상영이 끝난 후 7분간 기립박수와 환호가 이어지기도 했다. 유해진 박해일 이민호가 뭉친 '암살자(들)' 역시 하반기 주요 기대작으로 꼽힌다.
한국 영화 위기론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올해 상반기 극장가는 그 위기론에 균열을 내고 있다. 하반기 기대작들까지 제 몫을 해낸다면, 2026년은 한국 영화가 긴 침체를 지나 다시 반등의 해로 기록될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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