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고 자극적인 게 넘쳐나는 요즘, 착한 작품의 미덕이 무엇인지 조용하지만 울림 있게 증명하는 작품이 다시 무대 위에 올랐다. 모두가 지나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앞으로 지나갈 나이대로 설정된 인물들의 삶과 감정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관객들의 마음에 스며드는 '나빌레라'다.
뮤지컬 '나빌레라'는 삶의 끝자락에서 발레라는 꿈을 선택한 일흔여섯 노인 덕출과 불안한 청춘 속에서 방황하는 스물셋 청년 채록의 교감과 성장을 그린 작품으로,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퇴직 후 적적하게 지내고 있는 덕출은 자신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것과 함께 어릴 적 아버지의 일 때문에 갔던 러시아에서 공연을 보고 발레리노의 꿈을 갖게 된 과거의 기억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어 가족들의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발레단을 찾아간 그는 그곳에서 전도유망했지만 발목 부상과 생활고가 겹치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발레를 향한 열정을 접고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고 있는 청춘 채록을 만난다.
처음에는 덕출을 반기지 않지만 그의 진정성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채록은 생의 끝에서 발레를 선택한 할아버지를 보고 다시 도약할 힘을 얻는다.
그렇게 함께 공연을 준비하던 중 채록은 우연히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비밀이 적힌 덕출의 수첩을 보고, 덕출의 상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며 채록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과연 두 사람은 함께 날아오를 수 있을까.
작품은 가장으로서 하고 싶은 게 아닌 해야만 하는 일만 묵묵히 하다가 일흔여섯에 꿈을 좇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절실한 덕출과 재능은 타고났지만 이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기에 앞으로 살아가는 게 더 막막한 스물셋 채록의 이야기다.
얼핏 보면 대척점에서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발레라는 공통분모로 얽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고 성장하는 걸 넘어 한 사람의 꿈이 다른 이의 현재를 움직이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뮤지컬과 발레를 모두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나빌레라'만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화려함을 과시하는 안무보다는 팔을 뻗는 자태나 시선 하나에 감정을 실으면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전달하는 몸짓으로 존재하며 보는 이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여기에 작품의 온도를 한층 따뜻하게 올리는 건 배우들의 열연이다. 초연과 재연에 이어 이번에도 덕출로서 무대에 오르고 있는 최인형은 그동안의 내공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인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번 시즌에 채록 역으로 새롭게 이름을 올린 재윤은 최인형이 단단하게 잡은 극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자연스러운 호흡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과장되지 않은 표정 연기와 미세하게 변하는 톤 등으로 불안과 열정이 공존하는 청춘의 감정을 밀도 있게 표현한다. 또한 발레와 연기를 모두 소화해야 하는 두 사람은 몸의 움직임을 감정으로 연결 지으며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이야기로 불러들인다.
원작을 기반으로 하는 뮤지컬은 이야기를 압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의 선택과 집중이 완성도를 좌우한다. 이는 곧 작품이 설득력 있고 또 다른 매력의 작품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대표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지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성보다 가족의 이야기를 더 다뤘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조금은 들지만, 덕출과 채록에 집중하면서도 원작의 핵심 정서를 해치지 않고 뮤지컬이라는 무대에서만 펼쳐낼 수 있는 퍼포먼스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나빌레라'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가장 빠른 때일까?'라는 의문으로 출발했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덕출과 채록의 행보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고, 더 나아가 현실에 치여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펼쳐보고자 하는 용기를 심어준다.
올해로 창단 40주년을 맞이한 서울예술단이 가정의 달인 5월에 꺼낸 이유를 오롯이 무대 위에서 설명하는 '나빌레라'는 오는 17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이어 작품은 오는 6월까지 대구 등 국내 지방 투어를 이어간 후 7월 대만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