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샛별 기자]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슬픔이 덜하진 않다. 예견된 아픔이라고 해도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법은 없다. '국민 배우' 이순재라는 큰 별을 떠나보낸 연예계는 물론이고 그의 연기에 웃고 울었던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겼다.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영면에 들었다. 향년 91세. 고인의 빈소는 이날 오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오후 2시경부터 조문을 받고 있다.
다만 일반 시민의 빈소 조문은 받지 않는다. 대신 KBS 별관에 분향소를 차려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오후 5시쯤부터 방문 가능하며 조의금은 받지 않는다.
발인은 오는 27일 오전 6시 20분이다. 같은 날 오전 8시 30분에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뒤 장지인 경기 이천시 에덴낙원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1934년에 태어난 그는 대학교에 진학한 후 영화 '햄릿'을 보고 연기에 눈을 떴다. 이후 1956년 연극 집단 '떼아뜨르 리브르'에 입단했으며 연극 '지평선 너머'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대학 졸업 이후엔 연극인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동인제 극단 '실험극장'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KBS 개국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하며 TV 드라마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1965년 TBC 개국과 함께 TBC 전속 탤런트가 된 그는 다양한 무대를 오가며 다채로운 활약을 펼쳤다.
주요 출연작은 드라마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사모곡' '허준' '상도' '이산'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뚫고 하이킥' '개소리' 등 무려 140편에 달한다. 여기에 연극 '장수상회' '앙리할아버지와 나' '리어왕' '고도를 기다리며' 등으로도 관객을 만났다.
뿐만 아니라 예능 '꽃보다 할배'에도 출연하며 작품과는 또 다른 이미지로 대중에게 친숙함을 안겼다.
이에 힘입어 지난 1월 개최된 '2024 KBS 연기대상'에서는 KBS2 드라마 '개소리'로 대상을 받으면서 '역대 최고령 대상'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그는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날도 있네"라며 감격에 젖은 수상 소감을 남겨 많은 이들의 뭉클함을 자아냈다.
이처럼 데뷔 후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70년이 넘는 시간을 연기로 채워왔던 이순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배우였다.
그의 건강 문제가 대두된 건 지난해 말부터였다. 10월 건강 이상으로 인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공연을 몇 차례 취소했고 끝내 중도 하차했다. 당시 제작사 파크컴퍼니는 "선생님께서는 관객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평생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서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했으나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강한 권고에 공연 취소를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연말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잠시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지난 4월 개최된 한국PD대상 시상식을 비롯해 이후 무대에서는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지난 8월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간담회 때는 배우 박근형이 이순재의 건강을 언급하며 "저희가 여러 번 찾아뵈려고 했으나 상당히 꺼리셔서 뵙질 못했다. 먼발치로 다른 사람들 통해 얘기를 듣고 있는데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배우 정동환이 10월 진행된 '2025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이순재 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선생님의 건강이 회복되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의 바람과 달리 그의 건강은 끝내 호전되지 못했고, 우리는 또 한 번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맞이하게 됐다.
흐름상 예견된 상실이고 아픔이었지만, 현실이 된 부고 앞에서 고인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더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이에 연예계는 슬픔에 잠겼고, 후배들은 물론이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배우들은 고인과 함께한 사진을 게재하며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언제나 기억하겠다"고 애틋한 메시지를 남겼다.
이날 예정된 행사들에서도 고인을 향한 추모 분위기가 이어졌다.
먼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친애하는 X'는 종영을 앞두고 배우 김유정과 김영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정은 예정대로 이뤄졌지만, 당초 계획과 달리 기사 공개를 늦추기로 했다. '친애하는 X' 측은 "원로배우 이순재 님의 별세 소식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이에 금일 진행되는 인터뷰의 엠바고(정해진 기간까지 기사를 보도하지 않고 보류하는 것)를 요청한다"고 전했다.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예능 '케냐 간 세끼' 제작발표회에서는 '꽃보다 할배'로 인연을 맺은 나영석 PD가 직접 애도의 뜻을 밝혔다. 그는 "1년 동안 선생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뵙지를 못했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사적인 자리에서 끝까지 무대 위에 서 있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던 선생님이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전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며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실 수 있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 또한 "한평생 연기에 전념하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품격을 높여오신 이순재 선생님은 연극과 영화 방송을 넘나들며 웃음과 감동, 위로와 용기를 선사해 주셨다"며 "선생님께서 남긴 작품과 메시지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질 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이순재는 배우로서, 스승으로서, 선배로서 마지막까지 열정과 성실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보낸 것은 단지 한 명의 배우가 아니라 한국 연기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그리고 그의 연기와 삶은 이제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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