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샛별 기자] 배우 박지현이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20대부터 40대까지 한 인물의 굴곡진 삶을 그려내며 '나이까지 연기한다'는 호평을 이끌었다. 박지현에게도 '인생' 캐릭터였다. 삶과 죽음, 관계와 감정에 대한 깊은 화두를 던지며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박지현은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극본 송혜진, 연출 조영민) 공개 관련 인터뷰를 진행했다. 극 중 상연의 20대부터 40대까지 연기한 그는 작품과 캐릭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12일 15부작 전편 공개된 '은중과 상연'은 매 순간 서로를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며 또 질투하고 미워하는 일생에 걸쳐 얽히고설킨 두 친구 은중(김고은 분)과 상연(박지현 분)의 모든 시간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10대부터 40대까지 서로의 삶을 끊임없이 스쳐온 두 친구의 서사를 담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은 은중과 상연 두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된 이야기 역시 세 번의 헤어짐 끝에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의 10대부터 40대까지 질투와 동경을 오갔던 오랜 시간을 따라간다.
박지현은 극 중 조력 사망을 앞둔 상연 역을 맡아 삶의 끝자락에 선 인물의 감정과 현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감정의 폭이 큰 캐릭터였던 만큼 연기자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많은 것을 고민하고 받아들인 시간이었다.
박지현은 인터뷰 내내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시청자들의 호평은 물론, 동료 배우들과 제작진에 대한 깊은 고마움도 함께였다.
"좋은 반응을 들을 때마다 감개무량하죠. 제가 다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고은 언니와 감독님, 그리고 스태프 모두가 함께 만든 결과물이죠."
박지현은 첫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이런 대본을 만나고 싶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작품,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다"고 다짐했다.
그는 데뷔 이후 수차례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그럼에도 어떤 인물이든 진심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는 편이다. 사실 상연은 수많은 캐릭터 중 오히려 쉬운 편이었단다.
"어떻게 보면 상연이는 제일 쉽게 이해된 인물일 수도 있어요.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 모든 서사가 담겨 있으니까요. 상상하지 않고 대본을 따라가기만 해도 됐어요.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러웠죠."
다만 감정의 폭이 큰 만큼 다소 어려운 감정일 때도 있진 않았을까. 이에 박지현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는 자신만의 연기관을 강조했다. 범죄자든, 상처 입은 사람이든, 그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으며 캐릭터에 다가가는 태도였다.
상연과 은중의 관계는 친구일 수도, 가족일 수도, 연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박지현은 그 관계를 '정의'하진 않았다. 그는 "상연이에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가족도 연인도 배우자도 없었다"며 "은중은 그 삶의 마지막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존재였다. 그런 관계를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때로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관계도 있지 않을까 싶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이번 작품은 '조력 사망'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담고 있다. 배우로서도 시청자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제다. 박지현은 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력 사망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됐다고 전했다. 박지현은 "상연을 연기한 입장에서 그리고 아직 작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지만 고통을 끝낼 기회는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사회적·윤리적·법적으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주제예요. 그래서 저도 정말 많이 공부했고, 상처받는 분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접근했어요."
박지현은 상연의 40대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단식까지 감행했다. 3주간의 휴식 기간에 모든 음식을 끊으며 '아픈 건 이런 걸까' 싶은 상태를 몸소 체험해 본 그는 "몸은 말라가는데 오히려 얼굴은 붓더라"고 돌이켰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박지현은 실제 촬영에서도 이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촬영 때는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단식을 할 순 없었다. 다만 당일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부러 대본을 읽으며 2~3시간씩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단식한 것처럼 얼굴이 부어 있다"며 "우는 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참는 게 어려웠다"고 담담히 말했다.
박지현에게 이번 작품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죽음이 두렵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죽음이 무조건 나쁘거나 두려운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잘 죽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됐어요. 결국 잘 사는 게 잘 죽는 방법이니까요."
작품은 끝났지만, 상연은 아직 박지현 안에 남아 있다. 연기와 삶을 분리한다고 믿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캐릭터의 감정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평소에는 컷 소리와 동시에 잘 돌아오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끝나고 여행도 다녀오고 영화 홍보도 바쁘게 했는데 어느 순간 제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더라"고 말했다.
끝으로 박지현은 작품에는 담기진 않았지만 극 중에서도 그리고 작품을 끝내고서도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상연의 마지막 호흡을 연기하던 날, 김고은의 애드리브를 통해 깊은 감정의 여운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밸브를 열고 숨을 쉬고 있는데 은중이가 '상연아 숨 쉬어. 상연아 고생했어. 사랑해'라고 한다. 눈은 감기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인데 그 말이 계속 들려서 답을 하고 싶더라"고 돌이켰다. 평생 누구에게도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적 없던 상연을 오롯이 이해했던 박지현이었기에 그의 말은 마지막까지 울림을 남겼다.
"고은 언니이자 은중이의 '사랑해'에 답하고 싶었어요. '은중아, 나도 사랑해'라고. 비록 말은 못 했지만, 상연이의 마지막 호흡에 그 마음이 담겼을 것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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