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연예계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도 많고, 이들을 팔로우하는 매체도 많다. 모처럼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대면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내용도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마저 소속사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현실에서도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느낌을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박지윤 기자] 흔하고 뻔한 수식어지만 그동안 기자에게 이정은은 '믿고 보는 배우'였다. 그러다가 실제로 처음 만나 약 50분간 대화를 나누면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기분 좋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계속 보고 싶은 배우이자 멋지고 좋은 사람 그리고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 됐다.
이정은은 '좀비딸'(감독 필감성) 개봉을 앞둔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났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지만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배우로서의 목표와 사람 이정은의 가치관까지 들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매 작품 얼굴을 갈아 끼우는 활약을 펼치고 연기를 잘하는 걸 넘어 대중에게 신뢰를 얻고 호감을 사는 배우가 된 데에 그냥은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먼저 이정은은 시사회 이후의 반응을 주도면밀하게 보고 있다면서 이번 작품에 매력을 느낀 지점도 언급했다. 그는 "여러 평이 나오는 게 좋고 '이야기가 단편적이다'라는 지점도 좋다. 저희 부모님 세대나 제 또래들은 이야기를 너무 꼬아놓으면 제대로 못 즐기는 경우도 있어서 반대로 (생각을) 틀면 이 부분이 장점이 될 수 있는 것 같다"며 "좀비물인데 가족과 이웃에 관한 이야기이고 바이러스에 걸린 인물을 살려낸다는 점이라서 선택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7월 30일 개봉한 '좀비딸'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좀비가 된 딸 수아(최유리 분)를 지키기 위해 극비 훈련에 돌입하는 딸바보 아빠 정환(조정석 분)의 이야기를 담은 코믹 드라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며 데뷔작 '인질'(2021)에 이어 티빙 '운수 오진 날'로 흡입력 있는 연출을 보여준 필감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어촌 마을에 사는 흥과 정이 넘치는 할머니 밤순 역을 맡은 이정은은 소름 돋을 정도로 웹툰과 똑같은 외적 비주얼을 완성했다. 자신을 '만찢녀'로 만들어준 분장과 헤어 메이크업, 의상팀의 노력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는 "제 머리가 아니고 새롭게 제작된 가발이다. 정말 많은 공을 들여주셨다"고 감사함을 표하며 "배우에게 이러한 마스크 보호막이 있는 건 좋은 것 같다. 특수한 걸 입고 연기하니까 마치 놀이 같아서 좋아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밤순이 된 이정은은 사랑의 효자손으로 좀비가 된 손녀의 기강을 잡는 등 만화적인 설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제대로 책임진다. 또한 그는 스포일러이기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캐릭터가 가진 내면의 아픔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들여다보며 마냥 붕 떠 있을 수 있는 밤순을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자식에게 간섭하는 부모도 있고 어느 정도 떨어져서 지켜보는 분도 있잖아요. 이러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툰을 봤는데 대본보다 풍요롭지는 않아서 참고만 했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요. 영화에 짧게 담겼지만 칠곡 어머니들이 래퍼로 출연하셨거든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시골에서 이웃들과 지내면서 아픔을 담은 랩을 하시는 칠곡 어머니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보고 많이 배웠어요. 감독님께 좋은 서사를 부여받아서 그렇게 인물을 찾아갔죠."
이번에도 사투리 연기를 소화한 이정은은 젊은 세대와는 또 다른 느낌인 어르신들의 말투를 구현하기 위해 다섯 명의 선생님에게 녹취를 받아 끊임없이 연습했다고. 그는 "옛날에는 '정말 열심히 했다' 정도로 끝냈는데 쉽게 해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진짜 힘들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면서 사투리 연기를 위해 도움을 준 선생님들을 언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선생님들께 좋은 페이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화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많은 배우들께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평소에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의 주변을 관찰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을 꿈꾸는 그의 배려심과 세심함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웹툰을 찢고 나온 비주얼과 믿고 보는 연기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정은 표 2NE1(투애니원)의 '내가 제일 잘나가'다. 예전부터 실제로 방송 댄스를 배웠다는 말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취미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연기에 도달하고자 정박이 아닌 변박에 가까운 K팝 댄스를 몸으로 익히기 위함이었다는 걸 듣고 나서 그가 본업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단조로운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해요. 요즘 K팝은 변박이 많은데 이게 연기에도 필요하거든요. 서양 분들이 K팝에 열광하는 이유도 춤의 디테일함이 엄청 잘게 쪼개지기 때문이죠. 예전에 무대할 때 제가 다른 친구들과 호흡이 다르다는 건 알았는데 송강호 선배님이나 조정석 배우 등 정박에 가깝지 않은 분들을 보면서 (그런 연기에 대한) 부러움이 커졌어요. 작품을 많이 하다 보면 제가 갖고 있는 게 읽힐 수밖에 없는데 예상할 수 없는 박자에 들어가는, 대중에게 읽히지 않는 재밌는 배우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영화 '택시운전사' '미성년' '기생충' '내가 죽던 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아는 와이프' '타인은 지옥이다' '눈이 부시게' '동백꽃 필 무렵' '우리들의 블루스' '천국보다 아름다운', 디즈니+ '조명가게' 등 스크린과 브라운관 그리고 OTT 플랫폼까지 종횡무진하며 '열일'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여전히 이정은의 연기는 기자의 기대 이상이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매번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래서 다소 깊이감이 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의 연기를 보고 100% 만족하나요?"를 말이다. 그러자 이정은은 어떠한 답이 아닌 똑같은 질문을 기자에게 던지면서 직업은 다를지언정 관련된 고민은 비슷함을 짐작게 했다.
"만족하다가도 '더 노력했어야 됐나?'라는 생각을 해요. 다음에 더 잘하고 싶으니까 스트레스를 받는데 또 이게 저를 움직이는 요소가 되죠. (대중의 좋은 반응이) 격려는 되지만 스스로에게 가혹해요.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슬픔이 있잖아요. 계속하면서 찾아가야되는 것 같아요. (결과물은) 노력한 만큼 나오는 것 같아요. 노력이 늘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너무 욕심내기보다 자신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보려고 해요.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도 예뻐해야죠. 그래서 저는 제 작품을 꼭 봐요. 이미 한 걸 뒤집을 수는 없지만 아쉬운 걸 찾아내면 다음에는 좋은 길을 갈 수 있으니까요."
쉼 없이 활동하면서 체력적인 부담을 느꼈던 이정은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아프리카로 향해 따뜻한 온기를 전하면서 말이다. 그는 이 같은 행보에 관해 "공인이 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된다고 생각한다. 같이 잘 사는 것에 대한 관심도 많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어른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기자가 본 이정은은 직업과 일상의 시간을 분리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편하게 밖을 돌아다니면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주변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연기의 소스도 얻고 있는 것. 그렇게 그는 누군가의 부름을 받아야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만큼, 현재에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영원을 기대하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자신이 세운 이정표를 향해 뚝심 있게 걸어가고 있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하지만 저는 시간을 마음대로 쓰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멈추기도 하고 달려도 보면서 말이에요. 모든 관객이 바라는 배우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제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는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니까요. 질리지 않도록 연기를 하려면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상을 즐기면서 연기의 재료를 얻으니까 직업 외의 일상을 잘 지키는 게 우선이죠."
약 5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는 기사가 아닌 메모장에 따로 적어놓고 꺼내보고 싶을 정도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말이 가득했다. 여기에는 따뜻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어른의 넓은 마음과 만족하지 않아서 발전할 수 있는 노력파 배우의 열정도 깃들어 있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충분히 예상가능한 답변만 돌아오는 뻔한 시간이 아닌, 유익한 인터뷰를 만들어준 이정은은 끝으로 '좀비딸'의 매력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저희 어머니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영화예요. 바이러스처럼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이를 제거하고 없애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면 그런 콘텐츠들을 감싸안고 같이 의논하고 풀어갈 수 있는 다른 측면의 이야기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잖아요. 그리고 '좀비딸'이 바로 그런 측면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