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켜켜이 쌓으면서 더 진해지고 깊어진 후 영화를 하고 싶었던 배우 이민호가 드디어 스크린에 돌아왔다. 작품의 방향성부터 매력적인 인물까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흔든 '전독시'를 만났기에 가능한 10년 만의 컴백이다.
이민호는 23일 스크린에 걸린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감독 김병우, 이하 '전독시')에서 유중혁 역을 맡아 10년 만에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 이를 앞둔 그는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는 가치관까지 솔직하게 전했다.
'전독시'는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제작 단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민호가 '강남 1970'(2015) 이후 10년 만에 출연하는 영화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국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한류 스타로서 견고하게 입지를 다진 그가 왜 그동안 영화는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20대의 제가 극장에 가는 건 정서적인 해소나 이야기를 진하게 느끼고 싶을 때였어요. 그래서 20대보다 30대가 되고 나서 더 많은 것들로 저를 채우고 더 깊은 이야기를 큰 정서와 감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됐을 때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강남 1970'은 그래도 입대 전에 영화 하나는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찍었죠(웃음)."
그렇다면 30대가 되고 나서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새길 첫 영화로 '전독시'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민호는 "작품이 기획되고 2편 이상의 이야기까지 전달받았는데 작품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유중혁이라는 인물에 동요가 됐다"며 "이번에 영화를 봤는데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지점이 없더라. 진짜 모험을 떠나듯이 담백하게 쭉 가는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전독시'의 끌린 지점과 매력 포인트를 언급했다.
작품은 10년 이상 연재된 소설이 완결된 날 소설 속 세계가 현실이 돼 버리고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안효섭 분)가 소설의 주인공 유중혁(이민호 분)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액션 영화다. '더 테러 라이브'와 'PMC: 더 벙커' 등을 연출한 김병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극 중 유중혁은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주인공으로, 죽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회귀 스킬을 통해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실력과 강인함을 갖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어떠한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그는 동호대교 위에서 자신이 알던 전개와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는 김독자를 만나고 자신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 그를 또 다른 시험에 들게 만든다.
이를 만난 이민호는 원작을 중반 정도까지 읽고 인물의 정서와 작품의 방향성, 메시지를 인지했고 그 이후에는 상상력을 더해 자신만의 유중혁을 만들어냈다. 그는 오직 눈빛과 표정만으로 냉소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인물의 메마른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고난도의 액션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분명 적은 분량이지만 등장할 때마다 단숨에 스크린을 장악하면서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그러나 정작 유중혁을 멋있다고 느끼지도, 멋있게 그려내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이민호다. 그는 "주인공의 주인공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보통 주인공은 어느 정도 서사가 있고 저만한 이유로 보는 이들을 설득시킬 때 빛을 발휘하는데 유중혁에게는 그런 지점이 빠져있다 보니 어떻게 해야 이 인물을 통해서 이 세계관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글로 표현되지 않는 유중혁의 처절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캐릭터를 구축한 과정을 설명했다.
"인물이 극 안에서 성장할 때 멋있다고 느끼는데 유중혁에게는 그런 지점이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려는 정서가 묻어나와야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유중혁의 가장 큰 키워드는 고요함이었죠. 그 고요함 속에 아직 표출되지 않은 파도가 잠재된 인물이고요. 앞으로 그 파동이 표출될 유중혁이 궁금하지만 이걸 지금 풀어내는 건 투머치한 지점이 분명히 있었기에 완벽하고도 완전한 고요로 가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어요."
유중혁이 멋있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추구미'를 실현시키고 있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로는 느껴졌다고. 이민호는 "유중혁은 결과와 상관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살아날 수 있는데 많은 감정을 이겨내고 무언가를 계속하는 처연함이 저에게 좋은 영감을 줬다"며 "제 걸음과 행동에 의미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게 어떻게 비치는지 신경 쓰기보다는 주어진 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주의로 살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유중혁이 몸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물인 만큼 액션 합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 이민호다. 초반에 제작진들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다는 그는 이를 없애는 작업을 시작으로 계속 한계에 부딪히면서 더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저에게 시키는 걸 조심스러워하시니까 오히려 제가 더해보겠다고 말하면서 그걸 깨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러고 나서 소화할 수 없는 것들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해보고 안 되면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했죠. 유중혁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면서 가장 합리적으로 싸울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의 액션을 만들려고 했어요."
'전독시'는 글로벌 누적 조회수 3억 뷰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두터운 팬덤층을 보유하고 있는 인기 IP(지식재산권)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팬들의 걱정과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민호는 그렇다고 다른 작품들보다 더 큰 부담이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고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제 역할의 중요도나 작품의 사이즈에 따라 책임감이 달라지지 않아요. 그저 잘 됐으면 좋겠죠. 물론 원작이 있는 작품을 하는 건 너무 부담스럽죠. 애정이 큰 만큼 우려와 걱정이 동반되니까요. 그럼에도 이를 설득시키는 것 또한 배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과정에 충실하려고 해요."
과거 이민호는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던 '꽃보다 남자'를 시작으로 '상속자들' '더 킹: 영원한 군주' '푸른 바다의 전설' 등 안하무인 재벌이나 백마 탄 왕자님 등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며 존재만으로도 장르가 되는 활약을 펼쳐왔다.
그러다가 애플TV+ '파친코' 시리즈를 기점으로 '별들에게 물어봐'와 '전독시' 등 자신의 분량 등을 신경 쓰지 않고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결의 작품으로 대중 앞에 섰다. 이는 어떠한 계기로 이민호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바뀐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자의 예상과 달랐다. 그저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다양한 인물들의 구조가 중요한 작품들의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단순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모든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심플했어요. '상속자들'은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어보자는 생각이었고 여러 작품을 통해 의도치 않게 판타지 왕자 같은 이미지가 씌어졌는데 '더 킹: 영원한 군주'로 백마 타고 졸업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파친코'도 다들 의외라고 하지만 저는 언제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경험이 저에게 너무 좋게 작용해서 앞으로는 더더욱 선입견과 편견 없이 작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래 활동해 온 시간과 비례하게 자유를 찾은 이민호다. 그동안 자신이 받는 사랑에 책임감을 느끼고 이를 원동력으로 달려온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재정의하는 시간으로 30대 초중반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준비를 마쳤다. 그렇기에 앞으로 그가 어떤 선택으로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얼굴과 매력을 보여줄지 기대가 모아진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는 시기예요. 같은 정서를 접하더라도 과거에 비해 더 크게 느껴지는 시기라서 재밌는 지점들이 다시 생겨나고 있어요. 저는 30대에 접어든 순간부터 다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제가 느끼는 정서들을 많이 남겨서 지금을 기억하고 싶어요. '저 시기에 이민호는 저런 정서였지'라는 게 느껴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