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대체 불가함. 배우 이혜영에게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수많은 경험을 한 데뷔 45년 차에도 도전 그 자체였던 '파과'에 뛰어든 그는 유례없는 60대 여성 킬러를 성공적으로 그려내며 한국 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다.
이혜영은 지난달 30일 스크린에 걸린 '파과'(감독 민규동)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진행한 그는 "베를린에서 돌아왔을 때의 기세등등함은 사라지고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칭찬 일색이어서 감사하다"고 말문을 열며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기자들이 많이 모인 인터뷰 현장도 처음이에요. 세상이 달라진 건지 제가 스타가 된 건지 모르겠는데 이런 경우도 다 있구나라는 걸 느끼고 있죠(웃음)."
구병모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파과'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신성방역'에서 40년간 활동 중인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 분)과 그를 쫓는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 분)의 숨 막히는 핏빛 대결을 그린다.
이혜영의 출연 소식은 원작 팬들과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큰 기대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다만 그는 처음부터 원작의 존재를 알지 못했단다.
"민규동 감독의 제안으로 소설을 읽었는데 저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조각이 가진 파워가 궁금했어요. 수수께끼 같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이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아무것도 상상이 안 됐어요. 액션 영화의 거칠고 뻔한 대사 스타일이 있는데 할머니의 말투로는 상상이 되지 않았죠."
조각에 궁금증이 들었고 민규동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 강하게 끌린 이혜영이다. 그는 "민 감독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를 좋아한다. 이 사람이 화려하고 버라이어티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뮤지컬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배우를 시작했는데 '앤티크'를 보면서 민 감독은 음악과 리듬이 살아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며 "그래서 민 감독이 '파과'를 어떤 식으로 만들지 궁금했다. 쉽게 배우를 할 것인지 액션 영화에 도전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정했다"고 출연을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혜영이 바라본 조각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순진무구했던 설화(신시아 분)에서 쓰레기들을 방역하는 류(김무열 분)를 만나 킬러라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손톱이 스승을 잃고도 계속 살아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이혜영은 "그래서 저는 조각이 류의 환생이라고 바라봤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 여자가 살아야 할 이유가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조각을 만난 이혜영은 오랜 세월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노련함을 가졌으나 세월로 인한 한계에 부딪히는 인물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오롯이 눈빛에 담아내며 스크린을 장악한다. 또한 흐르듯이 부드럽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얼음처럼 단호해지는 물이 연상되는 액션 시퀀스를 소화한 그는 비녀 총기 맨몸을 넘나드는 액션 비주얼과 지독하고 잔인한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며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모든 액션신이 힘들었어요. 스턴트가 다섯 바퀴를 구르면 저는 적어도 세 바퀴를 굴러야 감정이 맞거든요. 스턴트는 스턴트대로 저는 저대로 힘들었죠. 조각의 액션은 쿨하게 기운을 빼고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아요. 아파도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쿨하게 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또 저는 순발력이 떨어지거든요. 놀라고 무대를 만들어주면 한참 연습을 해야 발휘되는 사람인데 이번에 한 프레임에 갑자기 요구되는 것을 바로 표현해야되는 세세한 경험을 했죠."
전설적인 킬러가 됐기에 그에 걸맞은 고난도 액션신을 촬영하면서 예상치 못한 부상도 입었다. 이태원 촬영 장면에서는 싱크대에 부딪혀 갈비뼈가 나갔지만 스케줄에 맞춰야 했기에 촬영을 강행했다.
액션신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꺼낸 그는 "로프를 타고 폐건물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도 힘들었고 맞고 넘어지는 것도 어려웠다. 쪼그려 앉아서 낮은 포복으로 갈 때는 허벅지가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직접 해냈다. 체력이 노쇠한 게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민규동 감독과의 첫 호흡은 어땠을까. 평소 시나리오에 의지하기보다 분위기만 파악하는 스타일이라는 이혜영은 '강철 콘티' 민 감독의 현장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아서 처음에는 많이 부딪혔다고.
"감독님이 '선배님 콘티 꼭 확인하고 나오세요.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할 거라고 믿고 있는데 혼자만 다르면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저희 작품이 쓸모에 관해서 말하니까 제가 쓸모 있는 배우가 되려면 민 감독의 프로세스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했죠."
또한 이혜영은 김성철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냈다. 과거의 기억을 품은 채 조각을 집요하게 좇는 투우의 애증 섞인 감정을 잘 표현한 김성철의 열연 덕분에 두 캐릭터의 관계에 특별함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네가 날 죽이러 온 게 아니구나'라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제거해야 될 애를 살려놓은 걸 나중에 알고 해결하려는 것 외의 감정은 없었어요. 그래서 조각과 투우의 관계성은 김성철이라는 배우의 힘으로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 데서 오는 저돌적이면서 청순함이 있어요. 이거는 한 살만 더 먹어도 안 나온다. 그 나이에만 있는 게 있죠."
1962년생인 이혜영은 1981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데뷔했고 드라마 '마더' '무법 변호사' '킬힐', 디즈니+ '카지노' 시리즈,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당신얼굴 앞에서' '앵커' '소설가의 영화' 등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대중과 만나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달려오며 어느덧 데뷔 45년 차를 맞이한 이혜영은 자신의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배우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런데 저처럼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 배우를 하는 것 같다"고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파과'는 '흠집이 났지만 익을수록 완벽하다'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작품은 60대 킬러라는 유례없는 캐릭터를 내세우며 액션 장르의 쾌감과 함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고민하게 되는 자신의 쓸모'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볼거리와 메시지를 모두 녹여냈다.
여자 배우의 쓰임이 남자의 상대적 존재로만 있었던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한 이혜영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유례없는 60대 여성 킬러를 연기하며 액션 장르를 앞장서서 이끌고 있다. 여배우들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의 변화를 누구보다 체감했을 그는 "이제는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다양해졌지만 대단해졌다고 착각할 필요가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성별을 떠나 인간으로서 살아남아야된다고 생각해요. 남자도 흉내 낼 수 없는 여자의 한계를 넘어선 한 인간이자 캐릭터가 중요한 것처럼 배우도 늙든 젊든 여자나 남자를 떠나서 한 인간의 존재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