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배우들은 늘 자신들이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데뷔한 지 41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김희애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그는 '가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작품을 고르고 있다. 흥행만을 좇는 작품에 출연해 이미지를 소비시키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배우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김희애가 배우로서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김희애는 오는 16일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 '보통의 가족'(감독 허진호)으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그는 개봉을 앞둔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과 만났는데 흥미롭게 보셔서 감사했어요"라고 말문을 열며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통의 가족'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던 네 사람이 아이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CCTV를 보게 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담은 웰메이드 서스펜스다. 네덜란드 인기 작가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하며 영화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김희애가 '보통의 가족'에 끌린 이유는 흠잡을 데 없는 시나리오와 허진호 감독이었다. 작품의 표지를 본 순간 설렜다는 그는 "완벽한 책이었어요"라며 설경구 장동건 수현이라는 너무 좋은 배우들과 하게 돼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죠. 촬영하는 내내 너무 신났고 행복했어요"라고 환하게 웃었다.
여배우라면 한 번쯤 허 감독과의 작업을 기다린다고 밝힌 김희애는 "믿음도 있었지만 괜히 좋은 거 있잖아요. 감독님의 전작들을 보면 여배우들이 아름답게 담기잖아요. 저에게도 허진호 감독님과 함께할 기회가 온 거죠"라며 "그런데 이번에는 굉장히 다크하고 현실적인 캐릭터더라고요. 저의 로망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 나이와 현실에 맞게 땅에 발 딛고 있는 인물을 만난 것 같아서 좋았어요"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허진호 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은 소감은 어떨까. 앞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진행한 설경구와 장동건은 촬영보다 장면에 관해서 각자의 의견을 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희애는 "각각의 방법과 스타일이 있잖아요. 감독님은 그런 스타일인 거죠"라며 "인스턴트처럼 캐주얼하게 작업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은 것처럼 쥐어 짜내셨죠. 그리고 항상 마음을 열어두세요. 정답은 없잖아요. 가장 좋고 창의적인 걸 끊임없이 생각하시는 분이죠"라고 회상했다.
극 중 연경은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자녀 교육부터 시부모의 간병까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성공한 워킹맘'이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그는 자신의 아이가 범죄를 저지르는 현장을 담은 CCTV를 보게 된 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연경을 연기한 김희애는 "자기 앞에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하며 "자식 일에 물불 안 가리고 형제가 싸우는 걸 보고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기도 하죠. 겉과 속이 다른 캐릭터는 아니에요. 보통의 한국 여자죠. 저는 나쁘게 보지 않았어요. 남편에게도 왕처럼 하지 않았을까요. 왕처럼 모셔야 자기도 왕비가 되는 거니까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희애는 이번 작품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춘 장동건을 언급했다. 장동건의 작품 중 하나인 '아스달 연대기'를 재밌게 봤다는 김희애는 "자칫하면 위험한 장르인데 이를 너무 잘 표현하더라고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비주얼이라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인데 이런 걸 잊어 버릴 만큼 현실 연기도 너무 잘하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해서 좋았어요"라고 함께 연기한 소감을 전했다.
또한 영화 '더 문'(2023)과 넷플릭스 '돌풍'에 이어 '보통의 가족'까지 세 작품 연속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설경구에 관해서는 "'더 문'에서는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이번에도 세 번의 식사 장면에서만 만났죠. 그래서 완전히 다른 캐릭터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촬영 순서는 '보통의 가족'이 먼저고 '돌풍'이 마지막인데 스크린으로 보니까 '돌풍'의 느낌은 전혀 없더라고요. 그래서 재밌었어요"라고 말했다.
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한 김희애는 약 41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우로서 대중과 만나고 있다. 긴 세월만큼 수많은 대표작과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켰지만, 이에 갇히지 않고 매번 다채로운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에 김희애는 "물론 저에게 책이 주어져야 선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가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흥행만 신경 쓰는 얍삽한 작품 말고요. 배우로서 소모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에요"라고 뚜렷한 소신을 밝혔다.
"유명한 감독님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저보고 최근에 이슈가 됐던 인물을 언급하면서 연기할 수 있겠냐고 지나가듯이 말하신 적이 있어요. 이걸 듣고 '어떻게 나랑 그 사람을 매치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가치 있는 작품이라면 하죠'라고 답했어요. 기존에 있던 이미지를 계속 우려먹는 게 아니라 반대의 것을 창조해야 저의 생명줄을 늘릴 수 있죠."
지난 2월 개봉한 '데드맨'을 시작으로 '돌풍'에 이어 '보통의 가족'까지 올해에만 세 작품으로 대중들과 만난 김희애다. 많이 하는 것보다 꾸준하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그는 "이번 작품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저의 연기 스펙트럼을 한 칸 더 열고 싶달까요"라고 바람을 내비쳤다.
'보통의 가족'은 제48회 토론토국제영화제부터 제26회 우디네극동영화제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까지 전 세계 유수 영화제 19회 초청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국내 언론에 처음 공개된 후 호평이 끊이질 않으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흥행은 하늘에게 맡겨야 한다는 김희애는 "현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드라마 같으면서도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도 있죠. 장르를 구분 짓기가 애매한 미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많은 관람을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