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대본이라는 구조 안에서 살고 작품으로 존재하는 배우 유재명이 '행복의 나라'를 만나 그 시대의 상징이 됐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부담감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말이다.
유재명은 14일 스크린에 걸린 영화 '행복의 나라'(감독 추창민)에서 10.26 사건 합동수사단장이자 또 다른 핵심 인물 전상두 역을 맡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그는 개봉을 앞둔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며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이선균 분)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로 천만 감독 대열에 합류한 추창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유재명이 연기한 전상두는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처음 대본을 받고 캐릭터를 쉽게 파악할 수 없었던 그는 출연을 고사했다. 이와 관련해 유재명은 "전상두는 작품의 중심인물이 아니라 박태주와 정인후 사이에서 그 시대의 야만성을 표현하는 캐릭터잖아요. 물론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는 것이 부담도 됐지만 전상두라는 인물 자체가 잘 안 보였어요. 마치 안갯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제가 표현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웠어요"라고 출연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 가운데 유재명은 늘 자신이 고사했던 작품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JTBC '이태원 클라쓰'다. 당시 박새로이(박서준 분)의 아버지로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스케줄 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다시 대본을 보면서 '제가 장대희 역을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역제안을 하면서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박힌 캐릭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행복의 나라'도 다시 들여다본 유재명은 "잔상이 남아 있었어요. 전상두라는 인물을 제가 빌드업시키기에는 분량과 서사가 극도로 절제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모티브가 된 인물을 파악하기보다 '행복의 나라'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집중했어요. 배우는 대본이라는 구조 안에서 살아야 되니까요"라며 "전상두는 그 시대의 상징이에요. 그래서 뜨겁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딜레마에 빠진 인간에게 더 큰 딜레마를 주는 상징 같은 인물을 한정된 대사와 장면으로 표현하기 위해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라고 설명했다.
실존 인물과 최소한으로 싱크로율을 맞추기 위해 헤어라인을 실제로 민 유재명은 자신의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을 방문해 추창민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는 "제가 연극을 하고 연출을 맡았을 때 '내가 테이크를 갈 거냐 메이크를 할 거냐'라는 고민을 했거든요. 그리고 이번에 감독님께 '메이크를 해 달라'고 했어요. 감독님은 원래도 테이크를 많이 가는 편이라 그렇게 한 장면에 10가지 버전도 했던 적도 있어요. 현장에서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제가 갖고 있는 모든 걸 쏟아냈어요. 그래서 다른 작품들보다 더 뜨겁게 다가와요"라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0.26 대통령 암살 사건과 12.12 군사 반란 사태를 관통하는 정치 재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동안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 등 두 사건을 다룬 한국 영화는 있었지만 그 사이에 벌어졌던 시간에 집중한 건 '행복의 나라'가 처음이다. 이에 유재명은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베이스로 하면서 거기에 연루된 개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신념 등을 다룬 영화"라고 차별화된 점을 언급했다.
그럼에도 지난해 12.12 사태를 다룬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동원한 만큼 극 중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전두광 역의 황정민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지점에 놓인 건 사실이다. 이를 알고 있는 유재명도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겠죠"라고 말문을 열면서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 그리고 '행복의 나라'가 같은 세계관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시대를 표현하는 게 자유로워졌다는 건 고무적이에요. 또 각각 다르니까 창작의 자유도 확인할 수 있고요. 각기 다른 개성이 부각된다는 점은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일이에요. 각기 다른 에너지와 질감으로 승부를 봤기 때문에 제가 맡았던 전상두를 연기함에 있어서 부담을 느끼기보다 영화가 요구하는 걸 찾으려고 했어요. 불편한 건 없었어요."
앞서 유재명은 '행복의 나라' 언론·배급시사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이선균을 떠나보낸 후 작품을 본 소감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당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자체를 오롯이 볼 수 없는 경험을 했다"는 그는 "이선균과 함께했던 시간이 겹쳐졌다. 박태주가 정인후에게 '자네한테 진 빚이 많아'라고 말하고 정인후의 얼굴이 나온다. 그리고 박태주가 정인후에게 '당신은 참 좋은 변호사야'라고 하는데 마치 '넌 좋은 배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감상평을 남긴 바 있다.
이날도 이선균의 이름이 나오자 유재명은 "개인적으로 이선균 배우에 대해서 절제하고 이선균이라는 배우의 연기에 관해 많은 관심과 접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면서 "'행복의 나라'가 박태주를 연기한 이선균을 보면서 잠시 우리가 잊고 있었지만 '정말 좋은 배우였지'라는 걸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라죠"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연기한 배우로서 깊은 여운을 안겼던 마지막 장면을 다시금 언급했다. 유재명은 "배우라는 게 참 행복한 직업인 게 정인후인데 조정석으로 보일 때가 있고 이선균인데 박태주로 보일 때가 있어요. 저 역시 동료들에게 유재명이었다가 전상두일 때가 있겠죠. 그럴 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제가 맡은 역할과 제가 평행선을 달리다가 교차했다가 또 멀어졌던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유재명 이선균 조정석 전상두 박태주 정인후 여섯 명이 다 같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경우가 쉽지 않다고 느끼고 있어요"라고 말해 먹먹함을 더했다.
'만약 이선균이 지금 함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진탕 술을 마시면서 아쉬움이 든 부분에 관해서 고민을 나눴겠죠"라고 답했다.
1997년 연극 '서툰 사람들'로 데뷔한 유재명은 2016년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 학생주임 역을 맡아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빈센조' 영화 '킹메이커' 등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유재명은 넷플릭스 '도적: 칼의 소리'와 디즈니+ '삼식이 삼촌'에 이어 디즈니+ '노 웨이 아웃'으로 전 세계 시청자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다. 특히 그는 '노 웨이 아웃'에서 흉악범 조두순을 떠오르게 하는 김국호 역을 맡아 역대급 악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짧은 텀에 여러 작품을 내놓고 비슷한 시기에 전혀 다른 결의 작품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 이미지 소비에 관한 고민은 없을까. 이에 유재명은 "우연히 이렇게 연달아서 작품이 공개되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이미지 소비를 걱정하지는 않아요. 배우는 작품을 해야만 존재하는 사람이거든요. 물론 그게 소비라면 소비일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모든 작품이 소중해요"라고 뚜렷한 소신을 밝혔다.
끝으로 유재명은 "'서울의 봄'이 사건의 연대기와 강력한 호흡으로 시대를 조망했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인물들의 야욕과 관계의 카오스를 표현했어요. 그리고 '행복의 나라'는 빛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한 개인을 통해 시대의 야만성과 인간의 근본 가치인 행복이 아무렇지 않게 짓밟히는 걸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서 영화적인 재미와 감동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많은 관람을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