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문화영 기자] 만으로 29살. 그런데 데뷔 25년 차다. 1999년 SBS '청춘의 덫'의 심은하 딸 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하승리는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버티는 자가 승자'라는 그는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길을 갈 예정이다.
지난 10일 종영한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극본 이정우, 연출 전우성·김한솔·서용수, 이하 '고거전')은 고려 8대 왕 현종(김동준 분)과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최수종 분)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다.
하승리는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고거전'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25년 차답게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술술 풀어내는 모습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극 중 하승리는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첫째 딸이자 현종의 후궁 원성왕후 역을 맡았다. 궁궐 안 여인이 아닌 궁궐 밖 사람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며 명랑하고 정의로운 성품을 지녔다. 그는 현종의 옆에서 조언과 위로를 아끼지 않으며 조력자로 활동한다.
"대하 사극 자체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궁궐에서 살던 여인이 아닌 궁궐 밖에서 살던 자유롭고 씩씩한 사람이잖아요. '표현이 어느 정도 허용될까' 고민이 많았죠. '태조왕건' 염정아 선배를 보며 참고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촬영까지 고만만 하다 끝난 것 같아요. 고민 해결됐다기보다 많이 배웠죠. 한 걸음 발전시켜준 작품이고요. 배움엔 끝이 없네요."
원성왕후는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다. 그 때문에 '막막했다'는 하승리는 궁궐 안 여인과 차별점을 두면서도 통통 튀는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의 성격이 달라져 아쉬웠다고 한다.
"아무래도 시청자 의견을 반영하다보니 성격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애초에 강인하고 당차고 여장부를 생각했고 정치적, 머리싸움으로 현종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후반부에는 옷을 만들고 바느질을 하더라고요.(웃음) 정치적 파트너로 나오지 않아 아쉬웠죠. '원성 쟤 왜 나오냐' 이런 말들도 있었고요. 이미 시청자들은 원정왕후(이시아 분)에 정이 있잖아요. 중간에 투입된 저를 경계할 수밖에 없죠. 당연한 현상이고 시청자 관점 중 하나예요."
아무래도 현종을 놓고 왕비 자리싸움을 하다보니 원정왕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하승리는 이시아와 전체적인 흐름보다 서로의 강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를 더 많이 이야기했단다. 또 본인의 MBTI는 INTJ라면서도 원성왕후는 T(사고)와 F(감정)가 반반 섞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시아 언니랑 '이 정도 고함을 치면 좋겠다' 등을 이야기했어요. 저는 원정왕후 앞에서 기죽으면 안 되잖아요. 약해 보여서도 안 되고요. 여러 가지 면에서 원성왕후는 T와 F 반반인 것 같아요. 굳이 따지자면 T가 52% 정도?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상대 감정을 파악해 공감과 조언을 잘해주죠."
'고거전'은 배우 최수종과 대하 사극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빠른 전개와 웅장한 전쟁 장면 등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상을 휩쓸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초 엉뚱한 전개와 역사 왜곡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와 관련해 하승리는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도 "작가님을 온전히 믿었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의 입장에 공감했다.
"역사가 모두 기록된 건 아니니 작가님 역량으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작가님을 믿었고 드라마적인 시선으로 보면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고 여기에 스토리적으로 무언가 필요했어요. 배우들은 그저 '맡은 바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했고요. 현장이 뒤숭숭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아쉽다는 건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거고 관심이 많았다는 뜻이잖아요. 제목에 '전쟁'이 들어간 만큼 시청자들도 확실한 '전쟁'을 원하셨을 거고요. 그런데 요즘 사극들이 현대적으로 넘어오면서 정통 사극보다 좀 더 가벼워지고 변화된 게 아닐까 싶어요. 이런 시도에 아쉬움이 남은 것 같아요."
김동준과 함께한 현장과 종방연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승리는 종방연에 400명 가까이 여의도 식당에 모였다며 모두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최수종의 미담을 전하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동준 오빠가 장난기가 진짜 많아요. 여배우들한테 장난을 잘 안친다고 들었는데 제가 남동생 같았나 봐요.(웃음) 반면 연기할 때 차분하고 대본 읽느라 입이 쉬지 않아요. 괜히 '아, 나도 집중해야지' 몰입하게 되고요. '고거전 최고 미인은 김동준'이라는 댓글을 봤는데 저희 모두 인정했죠. 최수종 선배는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야외 촬영 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선배가 드라이기를 가져가시는 거예요. '여자들은 머리가 길어서 말리기 힘들다'며 제 머리를 말려주셨는데 '1가구 1최수종' 해야한다니까요."
하승리는 2022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1'('지우학1')에서 양궁부 장하리 역을 맡았다. 당시 작품이 큰 인기를 끌었고 하승리는 '양궁 선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그가 '고거전'에서도 또다시 활을 잡았다. 카리스마 있는 '양궁 선배'의 면모를 다시 보여준 것이다. '지우학' 경험을 살려서 '고거전'을 촬영했다는 하승리는 "양궁과 국궁의 잡는 손 모양이 아예 다르다"며 "손이 틀릴 때가 있다. 나만 아는 옥에 티"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이로 따지면 '고거전'에서 막내 라인이지만 데뷔 년차는 웬만한 배우보다 선배다. 노련함이 보이지만 한편으론 조급함과 슬럼프도 찾아왔을 터. 실제로 과거 한 인터뷰에서 그는 "슬럼프를 겪었고 성향이 연예인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하승리는 "아직 촬영 외 카메라를 마주치면 심장과 손이 떨린다"면서도 "이겨내야죠"라며 덤덤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자신을 만든 작품들을 회상했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채시라 선배 아역이었는데 캐릭터적으로 새로운 시도였어요. 20살 슬럼프에 빠졌을 때였는데 그때부터 연기에 재미를 조금씩 찾아갔고 '새로운 모습'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이후엔 실제 노량진 고시생들이 DM을 보내시더라고요. '힘들었는데 힘이 됐다. 앞으로 좋은 영향 끼치는 작품 해줬으면 좋겠다' 등이요. 그 마음들에 울컥했어요."
하승리는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하고 첫 작품 '청춘의 덫'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때문인지 이후 줄곧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그는 "아역 이미지 역시 자신의 일부"라며 "여기에 큰 고민은 없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25년을 돌아봤을 때 '결국 버티는 자가 승자'라고 강조했다.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심은하 딸' 수식어 벗어나고픈 생각은 없고요. 최근 '양궁 선배' 별명이 생기듯 하나하나 만들어가면 이것 또한 저의 일부죠. 조급함은 없어요. 한순간 주목을 받으면 부담스러워요. 천천히 가는 게 제 방향성과 맞고요. 제가 걸어가는 길의 기준점은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직업상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고 원치 않는 의견에 상처도 받지 않아야 해요.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내 것을 지키면서 묵묵히 걸어가면 그게 맞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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