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문화영 기자] 데뷔 20년 만에 사극을 처음 해본 배우가 있다. 바로 이기우다. 190㎝의 훤칠한 키는 사극과 연이 닿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데뷔 초 '넌 키 커서 사극은 안 되겠다'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최근 이 벽을 시원하게 부쉈다. 사극이란 첫 페이지를 완벽하게 넘긴 이기우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지난달 17일 막을 내린 MBC 금토드라마 '밤에 피는 꽃'(극본 이샘·정명인, 연출 장태유·최정인·이창우, 이하 '밤피꽃')은 밤이 되면 담을 넘는 15년 차 수절과부 여화(이하늬 분)와 사대문 안 모두가 탐내는 완벽남 종사관 수호(이종원 분)의 담 넘고 선 넘는 아슬아슬 코믹 액션 사극이다.
이기우는 최근 서울 강남구 역삼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밤피꽃'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시원시원한 키와 뚜렷한 비주얼은 '조선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을 절로 떠오르게 했다.
극 중 이기우는 수호의 형이자 현 승정원 좌부승지인 박윤학을 맡았다. 박윤학은 그릇된 세상을 책임지고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남모를 비밀을 지닌 인물이다. 임금 이소(허정도 분)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인연으로 조정에 남아 오랜 시간을 감내한다. 또 그는 15년 전, 자신이 구해 온 수호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냉정하게 대하며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애쓴다.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다.
"형으로서 또 신하로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박윤학으로 끌고 가면서 '톤'과 '온도'를 다르게 해야 했어요. 장르가 코믹 액션 활극이잖아요. 여기서 (저의) 무게감을 잃어버리면 캐릭터가 안 남을 것 같더라고요. 적정 수준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어요. 왕과 신하의 선이 존재하기에 친하지만 친하지 않음을 나타내야 했고요. 수호한텐 '츤데레'처럼 뒤에서 챙겨주는 것들을 대사·표정으로 전달하기보다 오로지 '온도'로 보여줘야 했죠."
박윤학은 모든 인물과 관계성이 좋다. 이기우는 출연진 모두가 드라마에 잘 어울렸다고 정리하면서 촬영 과정이 따뜻하고 즐거웠기에 결과가 충분히 보였다고 덧붙였다. 또 러브라인을 형성한 배우 박세현(연선 역)과는 무려 17살이 차이 났지만 이를 모르고 촬영했다고 한다.
"누구 한 명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후배니까 '무조건 받들어야지'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하늬는 에너지와 열정이 엄청나요. 액션과 대사를 NG 없이 이어가고 5분 전 코믹 연기를 하다 또 5분 후엔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종원이는 기본적으로 선량해요. 순수하달까. 고집이 없어 조언을 빨리 자기화 시키는 친구예요. 특히 선배들 복이 많았는데요. 김상중 선배는 '그것이 알고 싶다' 톤을 보여주시거나 아재 개그를 하셨어요. 김미경 선배는 마인드가 젊고 유쾌하셨고요."
2003년 영화 '클래식'(감독 곽재용)으로 데뷔한 이기우는 '밤피꽃'이 첫 사극이다. 그는 "실제로 조선시대에 이렇게 큰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간 키 큰 사람으로서 받았던 제약을 설명했다.
"세트적·기술적으로 제약을 많이 받았어요. 또 (당시) 여배우 남배우 모두 키 큰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극 기회가 없었어요. 이제는 키 큰 분들도 많고 사극 소재도 자유로워졌어요. 또 모델 활동 당시 차승원 선배가 메인이셨는데 이후 '혈의 누'로 성공한 모습을 보며 막연한 동경을 가졌죠. 요즘 장신 후배들이 생겼는데 옛날 제 모습이 떠올라요. 제가 그 친구들에게 좋은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기에 '밤피꽃'은 이기우에게 새로운 페이지다. 또 처음 해 보는 것들이 뇌리에 박히듯 '밤피꽃' 촬영 하루하루가 '첫 기억'이라는 폴더로 마음속에 들어가 있다고 전했다.
"'앞으로도 사극을 할 수 있겠구나' 연기자 인생에서 못 넘기던 페이지를 넘긴 것 같아요. 갈증 해소랄까. '밤피꽃' 감독님이 '요즘엔 키 큰 배우들 다 사극하고 기우 씨랑 별로 차이 안나요'라고 하셨어요. 조마조마한 가슴속 무게 추가 팍 떨어져가는 기분이었죠. 인상적이고 새로운 경험이었고 특히 한복을 제 키에 맞춰 제작해야 했는데 비단이 많이 들어갔을걸요.(웃음) 버선 갓 상투 등 사극 인물 준비 자체가 재밌었어요. 사극 톤 대사도 한 적이 없어 대본에서 많이 공부할 수 있었는데요. 연기자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됐죠."
'밤피꽃'은 시청률 7.9%(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로 시작했다. 이후 3회 만에 10%를 돌파했고 코믹 액션과 시원한 전개가 입소문을 타더니 최종회에선 18.4%를 기록했다.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며 금토드라마 왕위를 차지한 '밤피꽃'은 전 작품 '연인'과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에 이어 흥행 3연타를 제대로 쳤다. 첫 사극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기에 의미도 남달랐을 터다.
"동기부여가 엄청 됐죠. 사극이란 걸 못할 줄 알았던 새내기가 20년 차 배우가 됐고 '못 가는, 막혀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장르가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됐어요. 처음인데 잘한다는 이야기가 감사했고 자축하고 격려했어요. 그래야 앞으로도 못 해본 연기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잖아요. '밤피꽃'은 저에게 그런 의미예요."
이기우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1년에 2작품이 꼭 이름을 올리고 있다. 꾸준히 대중을 만나고 있는 그에게 공백기는 거의 없는 셈이다. 올해 초 역시 '밤피꽃'으로 바쁘게 보냈기에 차기작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아직 결정된 작품은 없단다. 다만 그는 영화 '폭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정확한 개봉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불러주고 써줄 때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진 않으니까요. '앞으로의 20년도 지난 20년처럼 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물음표 100개가 찍혀요. 어떻게 해야할지 최근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고민과 고생을 해야 앞으로의 20년을 잘 보낼 것 같아요. 지금은 아내도 있고 반려견 2마리도 키우고 있어서 더 열심히 해야죠."
아울러 이 고민은 '새로운 변신'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발성과 목소리를 개선하려고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고 말했으며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땐 자신 역시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조를 전하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20년이면 안주할 법도 한데 다양한 캐릭터에 목말라 있는 그다.
"최근 다양하게 나오는 배우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친구인 김지훈이 노래 연습을 하더라고요. 두려움 없는 지훈이가 부럽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친구를 둬서 좋아요. '실패한' 운동선수를 연기하고 싶은데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고 동네에 어슬렁거리는 형이지만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요. '간지' 안 나는 방법이 있는데 제가 평소에 저렇게 다니거든요. 재활용 쓰레기 버리고 오는 모습을 거울로 보며 '진짜 허술하다'고 스스로 말해요. 190㎝에서 나오는 허술함을 제가 보여드릴게요."
'사극' 다음 페이지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 OTT 작품이 없는 이기우는 'OTT 연락 기다리고 있다'를 볼드체와 큰 폰트로 써달라고 웃으며 당부했다.
"OTT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어디서도 볼 수 있잖아요. 제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생태계예요. 팬들에겐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사극에 저를 써준 작가님 감독님도 감사해요. 20년 동안 안 열어본 페이지를 열어봤는데 그 내용이 나쁘지 않았어요. 이기우가 새롭게 열어갈 페이지가 실망스럽지 않도록 잘 할게요."
culture@tf.co.kr
[연예부 | ssent@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