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곡(154)] 최희준 '하숙생',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함축된 의미 담은 가사-구수한 창법 '국민가요 애창'
후배 남진이 가수 꿈꾼 롤모델, 당대 최고 스타가수

최희준은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57년 학교 축제에서 노래를 불러 입상한 것을 계기가 돼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4년 뒤 61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데뷔했다. /KBS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당대 최고 스타가수 최희준 씨는 제가 신인시절 하늘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동대문 고궁에서 사진 찍어준 기억이 엊그제 같네요. 선배님은 돌아가시기 몇년전까지만 해도 저를 보면 '이놈 이놈' 하며 50년전과 똑같이 내게 정겹게 대해 주셨는데 막상 세상을 떠나시니 인생이 너무 허무하더군요."

가수 故 최희준은 2018년 8월 24일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노환의 지병을 앓고 있긴 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에 가요계가 큰 슬픔에 빠졌다. 남진은 신인 때부터 자신을 이뻐해준 그의 부고에 "'형님 이제 제 차례네요' 하면서 한참을 울었다"고 말했다.

가수 남진에게 최희준은 롤모델이었다. 그가 가수 꿈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명시절엔 최희준 선배의 모창을 많이 했는데 하도 많이 다 대선배 최희준이 신인가수 남진의 노래를 커버한 줄 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희준은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57년 학교 축제에서 노래를 불러 입상한 것을 계기가 돼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졸업 후 곧바로 미8군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4년 뒤인 61년에 발표한 데뷔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가 크게 히트했다.

당대 최고 스타가수였던 최희준은 하숙생으로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전국 극장쇼 무대에 서면 기본적으로 하숙생을 세번 이상 앙코르로 불러야 무대를 내려올 수 있을 정도였다. /KBS 가요무대

66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표한 독집 음반에는 총 12곡 수록 중 '하숙생'과 '불타는 청춘'이 재킷 앞 뒷면을 장식했다. 이후 '맨발의 청춘'까지 1960년대를 풍미했는데 그에게 영원한 인생곡으로 남은 '하숙생'은 지금도 국민가요로 애창되는 곡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최희준의 '하숙생' 가사 1절)

'하숙생'은 '최희준 앵콜가요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대중의 공감을 얻을만한 사연있는 가사와 최희준의 구수한 창법이 돋보이는 노래다. 이 곡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최희준은 당시 'MBC 10대가수 청백전' 시상식에서 최고 인기가수상을 수상했다.

노랫말에는 말그대로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 空手去)'의 의미가 담겼다. KBS 연속극 '하숙생'(65년)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극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 김석야가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 김호길이 곡을 붙였다.

66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표한 독집 음반에는 총 12곡 수록 중 하숙생과 불타는 청춘이 재킷 앞 뒷면을 장식했다. 이후 맨발의 청춘까지 1960년대를 풍미했다. /음반재킷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스토리는 남녀간의 사랑에서도 실속만 챙기다가 약속을 깨고 결국 배신을 한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60년대 대중가요계는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 주제가를 불러야 인기 가수로 발돋움할 수 있던 시기다.

'하숙생'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이미 당대 최고 스타가수였던 최희준은 이 노래로 다시한번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전국의 극장쇼 무대에 서면 기본적으로 '하숙생'을 세번 이상 앙코르로 불러야 무대를 내려올 수 있을 정도였다.

정치에도 발을 들여놨다.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 발기인으로 참한 뒤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가수 출신 국회의원 1호였다. 200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감사로 활동했고, 2007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과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el@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