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배우 김희선이 20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고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쌓아왔던 두려움이라는 벽을 깨부쉈고, 관객들은 뜨거운 호평으로 반기고 있다.
김희선은 지난 15일 스크린에 걸린 영화 '달짝지근해: 7510'(감독 이한, 이하 '달짝지근해')에서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풀어내며 어떤 일에도 돌아가지 않고 직진하는 일영으로 분했다. 그는 개봉을 앞둔 1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태풍 카눈 여파로 비대면과 대면 인터뷰를 병행한 김희선이다. 계속 모니터만 바라보며 답변을 이어간 그는 오후 3시가 돼서야 직접 취재진을 만나게 됐고, 5명의 기자가 명함을 건네면서 인사를 하자 "이제 좀 인터뷰 같네요. 계속 모니터만 보고 했거든요"라고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동안 김희선은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 '나인룸' '앨리스' '내일' 등 꾸준히 드라마를 하며 시청자들과 만났다. 또한 넷플릭스 '블랙의 신부'에 출연하며 OTT 플랫폼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그동안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소화하며 작품마다 'N번째 재발견'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었던 만큼, 그가 한국 영화를 이렇게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성으로 간 사나이'(2003) 이후 약 20년 만에 국내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마친 김희선은 "해진 오빠가 있으니까 든든해요. 저는 묻어가려고요(웃음). 언론 시사회때 가장 무서웠어요. 기자님들이 저한테 질문하는 것도 무서웠고요. 그런데 잘 봤다고 해주시고, 좋은 기사가 나는 걸 보면서 한시름 놨어요. 큰 산을 넘은 기분이죠. 개봉을 아직 안 했는데 한 거 같아요"라고 소감을 전했다.
또 김희선은 언론 시사회가 열린 날 유해진과 함께 상영관을 살짝 들어가 봤다고 밝히며 "생각보다 기자님들이 웃음이 많으시더라고요. 안도했어요"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동안 영화를 하지 않았던 이유를 솔직하게 밝혔다. 연기 외적으로 부정적인 부분도 고스란히 자신의 탓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벽을 쌓게 됐다고. 김희선은 "너무 까여서 안 했어요. '캐스팅 자제가 말이 안 된다' 등과 같은 평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물론 스코어도 잘 안 나왔고요. '드라마는 되는데 영화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으니까 저 혼자만의 벽을 쌓았죠. 드라마를 하면 시청률이 나름 잘 나오니까 안전을 택하기도 한 거죠"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20년 동안 쌓았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희선은 대본을 읽으면서 캐릭터의 매력에 푹 빠졌고, 평소 팬이었던 배우 유해진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것에도 큰 기대를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를 향한 두려움이 더 컸던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출연을 고사했다. 그런 김희선의 마음을 돌린 건 이한 감독의 진심이 뚝뚝 묻어난 손 편지였다.
편지에는 김희선이 일영 역을 연기해야 하는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특히 '식당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희선 씨의 모습이 일영 그 자체였습니다'라는 문장이 기억난다는 그는 "이한 감독님이 자기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까 봐 같은 내용이 담긴 걸 타이핑으로 해서 하나 더 보내신 거예요. 정말 귀엽죠. 제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았지만 이렇게 저를 원하는 감독님이 있는데 제가 뭐라고 거절해요. 그래서 바로 전화를 드렸죠"라고 회상했다.
이어 김희선은 유해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출연 결정을 고민하는 사이 과자 회사 분량을 모두 찍은 유해진은 만남부터 이별까지 모든 상황과 감정을 상상으로만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첫 촬영 때를 회상한 그는 "해진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촬영 분량이 없을 때 배우가 현장에 오는 일이 드물거든요.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더니 '진짜 나타났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리고 다음 날도 오셨어요. 끝나고 한잔하면서 정말 많이 친해졌죠"라고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달짝지근해'는 과자밖에 모르는 천재적인 제과 연구원 치호(유해진 분)가 직진밖에 모르는 세상 긍정 마인드의 일영을 만나면서 인생의 맛이 버라이어티하게 바뀌는 이야기를 그린다. 극 중 일영은 대학생 딸을 둔 미혼모로, 대출심사회사 콜센터에서 일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자신에게 욕하는 진상 고객에게 "욕 발음이 정말 뛰어나세요"라고 말하는 세상 긍정 마인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특히 김희선은 차진 욕 발음으로 톡 쏘는 사이다를 선사한다. 이에 관해 "저 그런 거 잘 못해요. 연기로 처음 해봤어요. 아 물론 실제로도요"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이어 그는 "너무 상스러웠어요. 그런데 다들 제 욕 발음이 좋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달 26일 '밀수'(감독 류승완)를 시작으로 여름 텐트폴 작품들이 연이어 출격했다. 또한 '달짝지근해'는 '보호자'(감독 정우성), '오펜하이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와 같은 날 스크린에 걸리며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요즘 극장가다.
이 같은 상황을 마주한 김희선은 걱정하면서도 유일하게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작품임을 자신했다. 그는 "저희는 '안 블록버스터'에요. VIP 시사를 마치고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희 딸 친구들의 엄마들도 '칼, 피, 폭탄이 안 나와서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영화의 재미를 떠나서 아이와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달짝지근해' 만의 매력을 어필했다.
올해로 데뷔 30년 차가 된 김희선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러블리하고 유쾌한 캐릭터로 성공적인 스크린 복귀를 치렀다. '달짝지근해'로 영화에 대한 두려움의 벽을 깨고, 자신감을 장착한 만큼 앞으로 더욱 다채로운 행보를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은 정말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경험도 많잖아요. 예전과 촬영 현장도 많이 달라졌고요. 여건이 되니까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요(웃음). 그래서 촬영장이 더 즐거워요. 오랜만에 영화를 했는데 좋은 반응도 얻고, 현장도 너무 좋았어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달짝지근해'는 저에게 자신감을 준 작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