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불안정한 청춘부터 서번트 증후군, 샛노란 머리의 반항아, 성소수자까지. 여기서 더 새로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배우 박정민은 보란 듯이 또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하며 자신을 향한 괜한 걱정을 지워냈다. 역시 '변신의 귀재'다운 행보다.
박정민은 지난달 26일 개봉한 영화 '밀수'(감독 류승완)에서 조춘자(김혜수 분)와 엄진숙(염정아 분)을 보필하면서 잡일을 하는 장도리로 분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작품은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휘말리는 해양범죄활극이다.
개봉을 앞둔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난 박정민은 작품부터 일상까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꾸밈없이 솔직하게 꺼내며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줬다.
앞서 박정민은 류 감독의 전화를 받고, 대본을 보지 않고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2014년 단편 영화 '유령'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그동안 두터운 친분을 이어왔고, '밀수'로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 것. 이후 책을 펼쳐 본 박정민은 자신이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결의 캐릭터를 마주했고, 감사함과 의아함을 같이 느꼈단다.
박정민은 "장도리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나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런 걸 주셨지?' 궁금했어요"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류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했다고 밝힌 그는 "여쭤보면 '왜? 하기 싫어?'라고 하실까 봐요"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극 중 장도리는 해녀들을 보필하면서 잡일을 도맡아 하는 순박한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러던 중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이익만 좇는 숨어있던 욕망을 드러내면서 '하남자'의 절정을 달린다. 이번 작품을 위해 10kg을 증량한 박정민은 흰색 메리야스를 입은 채 볼록 튀어나온 배를 드러내는가 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하는 구레나룻을 장착하고 차진 충정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탄탄한 연기력에 파격적인 외적 변신을 덧입히며 극초반과 중후반 큰 폭으로 변화하는 캐릭터를 살벌하게 그려낸 박정민이다. 비열하고 극악무도한데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고 코믹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악역의 얼굴을 새롭게 그려낸 그는 극의 신스틸러가 되며 또 하나의 '인생캐'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박정민은 "감독님이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장도리라고 하셨고, 감독님 자체가 되게 재밌는 분이세요. 저는 감독님의 디렉션을 잘 받아먹었을 뿐이죠"라고 공을 돌렸다.
자신의 새롭고 신선한 비주얼을 마주한 기분은 어땠을까. 박정민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까 신나던데요"라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제가 장도리 같은 사람은 아니잖아요(웃음). 살을 찌우고 걸음걸이를 바꾸니까 큰 무기가 된 느낌이었어요. 연기하기 편했어요"라고 말했다.
2011년 '파수꾼'을 시작으로 '동주' '변산' '염력' '그것만이 내 세상' '사바하' '타짜: 원 아이드잭' '시동' '사냥의 시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적' '헤어질 결심' '일장춘몽'까지. 꾸준히 충무로의 선택을 받은 박정민은 매번 답습이 아닌 변주를 꾀하며 작품의 흥행과 상관없이 늘 연기 합격점을 받았다.
이렇게 연기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박정민의 최근 행보가 흥미롭다. 작품이 아닌 곳에서 보기 힘들었던 그가 유튜브로 영역을 넓히며 보다 더 다채로운 소통을 펼치고 있기 때문. 이날 유난히 힘들었던 30대 초반을 회상한 그는 "늘 쫓기듯이 살았어요. 마음고생을 많이 했죠. 이제는 마음이 편한 게 더 중요해졌어요"라고 달라진 삶의 가치관을 드러냈다.
늘 문제집을 푸는 것처럼 모범답안을 찾기 위해 몰두했던 박정민은 더 이상 배우라는 직업에 자신을 가두지 않게 됐다. 또 일상의 행복에 더 무게를 두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는 특별한 계기가 아닌,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탑승하니 찾아온 변화다. 실제로 이날 만난 그는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밝은 미소를 숨기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어느 순간부터 배우라는 이유로 다른 걸 하지 않는 게 부질없더라고요. 배우라는 직업이 제 행복을 방해한다면 그만둘 수 있겠다고 마음을 먹으니까 더 열린 것 같아요. 직업이 개인적인 행복이나 삶을 가로막는 게 바람직하지 않잖아요. 또 편해지니까 연기도 잘 되고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한 걸 다 보여주려고 하지 않고 현장에서 감독님과 소통하니까 더 잘 나왔어요. 과거의 저는 로직에 어긋나면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제 경험과 생각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아요."
늘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기를 준비했고, 정해놓은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박정민은 일상의 행복에 집중하며 강박감을 내려놓는 법을 터득했다. 스스로 '그래도 돼'라고 주문을 걸면서 영화도 한결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완성한 게 '밀수'의 장도리다. 배우로서, 그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더욱 특별함이 담긴 작품임이 분명했다.
"개봉할 때 되면 작품에 관해서 찾아보는 병이 있어요(웃음). 제가 함부로 재밌을 거라고 자신하는 것도 건방진 것 같아요. 그냥 많이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단편과 독립 영화를 전전하던 배우가 대선배님들과 여름 텐트폴에 나오는 자체가 신기하죠.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