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곡(119)] 윤수일 '사랑만은 않겠어요', 영원한 국민가요


'트로트 풍 가미'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대중적 노래 시도
'제2의 고향', '아파트', '황홀한 고백', '아름다워' 등 히트

작곡가 안치행의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히트하면서부터 윤수일은 트로트 풍이 좀 가미되더라도 대중적이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고자 했다. /락코리아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윤수일은 70~80년대 박일준 인순이 등과 왕성하게 활동했던 국내 대표 혼혈가수 중 한명이다. 주한미군 공군 비행조종사 칼 브라울 어게스트 대위였던 생부는 임신중인 윤수일의 어머니에게 미국 동행을 약속했으나 시험비행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

윤수일의 어머니는 입양보내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아들을 데리고 윤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했다. 다행히 새 아버지는 윤수일을 친자식처럼 아꼈고, 윤수일도 "날 친아들처럼 키워준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라며 존중했다.

유년시절부터 줄곧 울산에서 성장해 공부도 썩 잘한 편이었지만, 혼혈에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군 입대도, 공무원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의 다른 재능을 알아본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고교시절부터 '엔젤스'라는 밴드를 꾸려 활동했다.

당시는 그룹 사운드가 가요계 대세 트렌드였다. 실력을 인정받은 윤수일은 76년 신중현 사단의 '골든 그레이프스'(멤버 6명 중 4명이 혼혈 출신)에 합류하게 된다. 골든 그레이프스는 함정필(건반), 함중아(보컬) 형제가 주축이 된 싸이키델릭 록 밴드다.

이듬해인 7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출전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당시 안타프로덕션의 사장이자 작곡가인 안치행의 눈에 띄었고, 그의 곡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당신만을 만나지나 말 것을/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그 추억이 또 다시 온다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그 추억이 또 다시 온다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윤수일 '사랑만은 않겠어요' 가사)

윤수일은 7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출전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당시 작곡가 안치행에게 띄었고,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대히트를 기록한다. /윤수일 팬블로그

이 음반에 수록된 9곡 중 안치행이 작곡한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유일하게 트로트 풍의 곡이다. 이 때부터 윤수일은 트로트 풍이 좀 가미되더라도 대중적이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고자 했다.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나선 계기가 된다.

윤수일은 이후 안치행의 프로듀스로 78년부터 3년간 5장의 트로트 풍 가요 앨범을 더 내면서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다. 가요 프로그램은 물론 공개 코미디 등 TV 예능에도 자주 등장, 매력적인 보이스와 잘생긴 얼굴로 독보적인 위상으로 자리매김한다.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윤수일은 81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를 이끌고 록 풍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다시한번 변신을 시도한다. 그의 음악인생이 정점을 찍는 시기이기도 하다. 노래도 번안곡 2곡을 빼면 모두 윤수일의 자작곡이었다.

이듬해 1982년 '아파트'가 담겨있는 2집이 발매됐고, 이 노래가 사회적 현상에 힘입어 전국적인 히트를 치면서 그는 최고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는 서울 잠실 지역에 우후죽순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인기가 치솟으면 달라보이게 마련이다. 윤수일은 이국적이고 수려한 외모로 1980년대 당시 몹시 큰 인기를 끌었고 '떠나지마', '제2의 고향', '유랑자', '아파트', '황홀한 고백', '아름다워', '환상의 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주가를 올렸다.

78년 MBC 최고인기가요상, 최고 인기 신인 가수상, KBS 10대 인기가수상, TBC 7대 가수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87년까지 매년 연말이면 KBS 10대 인기가수상과 MBC 10대 가수상을 휩쓸었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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