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이하늬가 열고 박소담이 닫은 여성 액션 '유령'에서 설경구는 존재 자체로 '스포일러'가 됐다. 전면에 나서서 극을 이끌지 않았고, 설정된 반전 장치도 없었다. 그러나 설경구는 자신의 무게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관객들을 계속 교란시켰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설경구는 지난 18일 개봉한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에서 경무국 소속 무라야마 쥰지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작품은 1933년 경성, 조선 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다.
그는 개봉을 앞둔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카페에서 취재진들과 만났다. 그동안 꾸준히 작품으로 대중들과 소통했지만, 코로나19 이후 약 3년 만에 열린 대면 인터뷰였다. 필자는 지난해 넷플릭스 '야차' 공개 당시 화면 너머로만 그를 만났기에 더욱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고대했다.
이날 설경구는 담백하게 '유령' 비하인드를 털어놓는가 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던 시기를 솔직하게 밝히며 현장에 대한 감사함을 드러냈다. 또한 취재진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툭툭 내뱉는 말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시크해보이지만 정 많은 '지천명 아이돌'의 매력을 몸소 느낀 시간이었다.
지난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설경구지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유령'이 처음이다. 그는 '색감을 진하게 입혀서 결이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라는 이해영 감독의 기획 의도를 듣고 관심을 가졌고, 경험해보지 않은 시대의 착장에 따른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며 출연을 결심했다.
쥰지는 무라야마 가문의 7대손으로 조선의 언어와 사정에 능통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엘리트 군인이었다. 하지만 통신과 감독관으로 좌천된 그는 군인 시절부터 경쟁자였던 신임총독의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 분)가 항일조직 스파이 '유령'을 찾고자 설계한 덫에 걸려 용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먼저 '유령'을 찾아 경무국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야심을 보여준다.
이를 연기한 설경구를 지배한 감정은 바로 '연민'이었다. 군인 아버지를 두고 명문가의 7대손인 쥰지에게 조선인 어머니는 유일한 컴플렉스였고, 이를 지우기 위해 집착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그는 끝없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이는 단순한 출세욕이 아닌 자신에게 새겨진 조선을 지우기 위한 야망이었고, 그만큼 복잡다단한 내면을 지닌 인물이었다.
여전히 쥰지의 속을 모르겠다는 설경구는 "한 가지 단어로 그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다. 치욕도 있고, 엄마를 향한 애정도 있을 거다. 치욕이나 분노로 표현하거나 나열하기는 어렵다. 정말 복합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더 연민이 갔다. 악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작품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극초반 '유령은 누구일까?'로 밀실 추리극이 펼쳐지는 가운데 쥰지는 박차경(이하늬 분)에게 '내가 유령이다'라고 정체를 밝힌다. 이는 '유령'을 찾기 위해 쥰지가 놓은 덫이지만, 설경구를 향한 강한 믿음이 캐릭터로 이어지며 작품이 끝날 때까지 왠지 모를 반전을 기대하게 한다.
'유령처럼 하겠다'는 마음으로 촬영에 돌입한 설경구는 "모든 배우들이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데 쥰지는 혼선을 주는 역할이죠. 정체가 드러나면 재미없으니까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었어요. 정확한 꼭짓점을 두지 않고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게 저의 목적이었어요. 영화적으로, 기능적으로 접근했어요"라고 설명했다.
또한 설경구는 '유령'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으로 극의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는 이하늬와 두 개의 굵직한 액션합을 맞추는데 성별과 체급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어 흥미를 더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설경구와 죽기 위해 몸을 던지는 이하늬는 사람 대 사람, 그리고 캐릭터 대 캐릭터로 부딪히며 '유령'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을 완성했다.
"이하늬랑 하는 첫 번째 액션 말고는 다 살기 위한 액션이었어요. 처절하게 보여야 했죠. 제 선입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액션합을 맞추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그런데 이하늬가 잘 받아줬어요. 상대 배우가 힘들어하거나 한숨을 쉬면 선배여도 신경 쓰이기 마련인데 액션도 참 밝게 찍어서 편하고 재밌게 촬영했어요."
뿐만 아니라 설경구는 박해수와 처절한 맨몸 싸움을 벌인다. 극 중 카이토는 군인 시절 경쟁자였던 쥰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이다. 묘한 관계성을 띠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하며 팽팽한 심리전을 펼치고, 결국 바닥을 뒹굴고 물어뜯으며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를 '처절한 개싸움'이라고 표현한 설경구는 "박해수가 내 가슴을 타고 올라가고, 바닥을 발로 긁는 부분이 나와요. 이는 쥰지를 확실히 제거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오는 거죠. 지면 죽음이에요. 이하늬와는 합이 있는 싸움이었다면 박해수와는 합이 없는 개싸움이에요"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100% 일본어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한 박해수를 향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일본 배우가 캐스팅된 상황이었으나 코로나19로 촬영 진행이 어렵게 됐고, 2주 전에 대본을 받은 박해수였다. 휴대폰 너어로 그의 고민을 들은 설경구는 "말로는 못 할 것 같다고 하는데 들어보니까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라고 말해 취재진들을 폭소케 했다.
"저도 '역도산'때 일본어 대사를 해봐서 아는데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제가 결정할 수 없어서 감독님을 만나보라고 했어요. 감독님은 '보자마자 카이토였다'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첫 촬영이 식탁 신이었는데 중간에 끊지 않고 한 번에 해내더라고요. 저희도 모르게 감탄하면서 박수를 쳤어요. 박해수가 없었으면 이 영화를 못 찍었을 거예요. 제일 고마운 사람이죠."
그동안 작품 전면에 나서서 극을 이끌었던 설경구는 여성 서사 중심인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다. '유령'은 이하늬와 박소담의 반전 활약을 빼고 논할 수 없을 만큼 두 배우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각인되는 작품이었다. 또한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길복순'에도 매력적인 여성 액션이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을 마주한 설경구는 "반가워요"라고 운을 뗐다.
"조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주 테마로 가져간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여성 액션극은 좋은 현상이자 바람직한 현상이죠. 더 강렬한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거칠면서도 섬세한 게 매력적이거든요. 여기에 색감이 세게 입혀지니까 낭만적이고 아름답더라고요. 저는 이솜이 열고 이주영이 닫았다고 생각해요. 이하늬와 박소담은 충분히 각인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고, 저는 두 인물이 가장 생각나더라고요."
그동안 설경구는 영화 '박하사탕' '오아시스' '실미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등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며 쉬지 않고 대중들과 만나왔다. 한 작품을 끝내고 여운을 오래 가져가기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다음 작품에 곧바로 집중하는 그에게도 연기가 '그냥 하고 있는 것'으로 다가온 시기가 있었다. 스스로 끝을 느낀 설경구는 "'불한당'으로 구제받았죠"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가 있었어요. 연기를 그냥 하고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 '이제 추락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불한당'으로 구원받았죠(웃음). 연기가 절실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자산어보'를 찍을 때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가서 바다를 보고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감사함이 너무 커요. 지금 절실하면 제가 너무 오바할 거 같고요."
그의 바람은 '유령'의 흥행과 함께 극장가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유령' 외에도 영화 '더 디너'(가제) '소년들' '더 문'(가제), 넷플릭스 '길복순' 등 많은 차기작이 개봉 혹은 공개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그 누구보다 극장가의 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직 한국 영화가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극장에 붐을 일으킬 수 있는 건 결국 관객들의 몫이에요. 영화를 완성하는 건 관객이고, 다시 세울 수 있는 것도 관객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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