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연예계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도 많고, 이들을 팔로우하는 매체도 많다. 모처럼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대면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내용도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마저 소속사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현실에서도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느낌을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박지윤 기자] 배우 정우성은 가벼운 질문도 흘려듣지 않았고, 신중하지만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갔다. 그가 던진 말에는 뚜렷한 소신이 담겨 있었고, 그동안 '잘생김'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영화를 대하는 진중한 태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난 4일 배우 정우성을 만나기 위해 서울 삼청동 인근 카페로 향했다. 라운드 인터뷰가 이틀간 진행된 가운데, 두 번째 날 오후 3시 타임에만 9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영화 '헌트'(감독 이정재)를 둘러싼 관심은 이날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처럼 뜨거웠다. 흰색 티셔츠와 흰색 바지에 얇은 카키색 아우터를 걸치고 나타난 정우성은 "안녕하세요. 시작하시죠"라고 인사를 건네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난 10일 개봉한 '헌트'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이정재 분)와 김정도(정우성 분)가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직면하며 펼쳐지는 첩보 액션 드라마다.
정우성은 친한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동업자인 이정재의 데뷔 첫 연출작 주연을 맡아 스크린에 컴백했다. 여기에 1988년 영화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이정재와의 동반 출연으로 뜻깊은 의미를 더했다. 그러나 정우성이 출연을 확정 짓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작품을 고를 때 고려하는 시나리오나 캐릭터의 문제가 아닌 외부적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료이자 친구, 파트너가 제작 프로듀싱을 해보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가져왔을 때는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출연 제의를 받았던 초반에는 저희가 회사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죠. '자기들끼리 제작사를 차리더니 자기들끼리 영화를 찍네'라는 외부의 시선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더 조심스러웠어요."
한 발짝 떨어져 이정재 감독과 '헌트'를 지켜본 정우성은 네 번의 거절 끝에 결국 출연을 결심했다. 그는 "'이제는 바구니에 계란을 다 넣고 달리다가 깨져도 어쩔 수 없겠구나'라고 느꼈어요. 하지만 시도를 욕먹게 하지 않을 정도의 만듦새는 해야 했죠. 흥행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고요. 그런데 제가 같이하자고 했을 때 정작 정재 씨는 취해서 그 이야기를 기억 못했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극 중 김정도는 군인 출신 안기부 요원으로,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과 강인한 성품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이를 연기한 정우성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열연을 펼쳤고, '인생캐'라는 호평을 얻었다. "'정우성을 제일 멋있게 찍고 싶었다'는 이정재 감독의 '애정 필터'를 실감했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신인 감독의 오만이죠"라고 답해 웃음을 안겼다.
"저는 영화 구성에 더 집중했어요. 정도와 평호는 각자가 존재감을 발산하기보다 두 인물이 마주했을 때 흐르는 기류가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거든요. 그래서 영화 전체를 보려고 집중했죠. 보신 분들이 김정도를 좋게 평가해주시니까 칭찬으로 들려서 기분이 좋네요."
'헌트'는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이자 '청담 부부'가 23년 만에 연기 호흡을 맞추는 작품으로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정우성은 작품 밖에 놓인 의미에 도취되지 않았고, 오히려 경계했다.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의미부여 할 수 있게 됐다는 그는 "뜻깊은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 작업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안도와 뿌듯함이 들어요"라고 소감을 전했다.
"'헌트'가 절대적으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배우 이정재의 도전에 따른 평가 기준점이 있을 텐데, 그 이상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물론 정재 씨의 감독 데뷔작이 아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을 즐길 수 있었겠죠. 저희가 23년 만에 한 작품에 나온다는 의미에 도취돼있으면 안 됐고, 진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현장에 임했어요. 이제서야 의미부여 할 수 있게 됐네요."
국내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헌트'는 이제 토론토로 향한다. 여기에 정우성의 첫 연출작 '보호자'도 제47회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며 각자의 연출작으로 같은 곳을 가게 됐다. 정우성은 국내를 넘어 해외의 부름을 받고 있는 행보에 관해 "그동안 영화인으로서 열심히 지냈다는 걸 보여드리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라고 말했다.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한 정우성은 1997년 영화 '비트'로 단숨에 청춘의 아이콘이 됐다. 정우성의 '짜릿한' 비주얼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수식어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대중들의 예상을 깨는 행보를 보여줬다. 더 나아가 제작자, 그리고 연출자 정우성으로서 끊임없이 도전을 펼치고 있다. "제 영화 중에는 천만 관객이 없어요"라는 그의 한 마디는 29년의 배우 인생을 함축하고 있는 듯했다.
"저는 일을 시작할 때부터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도 제 것은 아니에요. 잠깐 주어진 것뿐이죠. 나이를 먹는데 평생 청춘의 아이콘으로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저라는 사람을 찾고 싶었어요.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어떻게 기억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저는 꾸준히 오래 하고 싶어요."
"제가 선택한 영화 중에 외면받은 것도 많아요. 제가 영화 '똥개'에 출연 할 때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많이 받았지만,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를 깨고 싶었어요. 성공도, 실패도 당연한 건 없어요. 온전히 제 것도 아니고요. 욕심을 내고 기대를 하게 되면, 이루어지지 않을 때의 상처 또한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성공에 대해 겸손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정우성의 원동력이 됐다. 29년 동안 성공과 실패를 수도 없이 겪은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앞으로 가야 할 올바른 길에 더 집중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시도로 영화계에 좋은 자극을 주는 정우성의 예측할 수 없는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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