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한림 기자] 배우 박해일은 인사 대신 시를 읊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르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한산섬 달밝은 밤에', 이순신)
박해일에게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은 큰 고민이었다. 자신의 평소 연기톤과 눈빛, 목소리나 기운이 대중이 흔히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다고 자평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인터뷰에 참석한 취재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진중한 톤으로 시를 읊었다.
박해일은 조선의 운명을 바꾼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한산해전을 그린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 역을 맡아 열연했다. 거북선과 학익진의 등장, 40분이 넘는 전투 신에서 대사 없이 존재감을 내비친 절제된 이순신의 모습 그대로를 표현했다. 영화는 개봉 2주차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순항 중이다.
박해일은 민망한 웃음을 보이더니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버겁고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지혜롭고 주도면밀한 지장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는 김한민 감독의 디렉팅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보다 선비스러움에 집중했다는 그의 인터뷰에서 비로소 이순신을 연기할 결심이 비춰졌다.
-멋진 시를 읊은 이유부터 듣고 싶다.
알아 본 바로 이순신은 시도 쓰는 장군님이었다. 전쟁을 버텨내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럴때 술을 한 잔 한다던가 했을텐데 늘 비가 왔다고 하더라. 난중일기를 보면 밤중에도 나가서 안 보이는 과녁에 활을 50발, 100발 땀이 흠뻑 젖게 쐈다는 일화도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린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쓰셨다. 인상적이었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전투에 임하는 수장이 일기도 쓰고 시를 짓는다는게 와닿았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시를 쓰셨다는 게 와닿았다. 그것을 연기할 때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산'에서 40대 후반의 젊은 이순신을 연기했다. 전작 '명량'이 워낙 잘되기도 해서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
초반에는 부담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촬영을 하면 할수록 그 부담은 오히려 도움이 됐다. '명량'을 함께 한 스태프들이 '한산'도 함께 했다. 또 대부분 '노량'으로 갔다. 감독님께서 작품마다 결이 달라 배우 캐스팅을 달리 한 것이라 이야기해줬고, 나 역시 이를 믿고 내 연기에만 집중을 했다.
최민식('명량' 이순신 역) 선배의 기운이 부담됐지만 '한산'을 촬영할 때는 기술적인 측면이나 연기를 해야 하는 환경들이 ‘명량’ 때 보다 효율적이고 나은 환경이었다. 최민식 선배는 바닷물에 배를 띄워 들어갔다가 점심때야 내려오는 물리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도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우리가 더 좋은 환경에서 찍고 있으니 더 잘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국민이 아는 스토리와 인물을 연기한 소감은 어땠나.
판옥선 위 전투를 지휘하는 공간인 장로에 혼자 서있으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전투 지휘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 현장에 있던 주민들도 저만 보고 있는 게 보인다.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전 국민이 위인으로 숭상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니 서 있기도 힘들고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감독님께서 '한산'을 '명량'과 다른 결로 보여주자고 얘기하셨을 때 '이순신이 수양을 많이 쌓은 선비같다'는 문장이 제게 깊숙이 들어왔다. 이순신의 모습을 단박에 세워두지 않는 방식으로 연기했다. 전투로 시작해 전투로 끝나는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했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있지만 한 인물을 그려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시대가 요구하고 바라는 부분을 부각시켜야 하는 측면도 있다. '한산'에서 이순신은 감성적이다. 그게 이 시대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은 말수도 적고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선비 같은 기질이 있는 분이었다고 하더라. 무인의 기질을 가져가면서도 이 부분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명령을 하더라도 시의적절할 때가 올때까지 침착함을 유지한다. 그런 부분도 일관되게 가져가려 했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 역을 맡은 변요한과 지략대결이 돋보인다. 연기 호흡은 어땠는지.
사실 변요한과 촬영장에서는 많이 만나지 못했다. 조선팀이 세트장에 들어와서 촬영하고 끝나면 왜군이 들어와서 촬영을 해야 했다. 그런데 같은 수군이다 보니 횟집에서 회동을 했다. 감독님과 난 촬영을 '극락도 살인사건' '최종병기 활'에서 함께 해봤지만 변요한과는 처음이라 횟집에서 서로 밤새가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각자의 역할 때문이라도 배려하고 존중해줬다. 또 서로 고생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힘을 많이 실어줬다.
캐스팅 비화도 있다. 내가 '한산'에 캐스팅된 후 변요한이 캐스팅 됐고 (요한에게)먼저 연략이 왔다.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내더라. 서로 다른 곳에 있었는데 포효하는 듯한 포즈를 하고 '한산 파이팅' 이라며 셀카를 보내왔다. 나도 답장을 보냈다. 이 것이 서로 '한산'을 대하는 시작이었다.
-'헤어질 결심'과 '한산'이 여름 극장가에 함께 걸려 있다. 두 작품 모두 촬영은 오래 전에 마쳤지만 개봉 시기가 겹치다보니 '조선이 그리 만만합니까?' '왜군은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등의 패러디 대사도 눈길을 끈다.
나도 그 패러디를 봤다. 두 영화 개봉 시기가 붙어서 그런 것 같은데 흥미롭더라. (웃음) 공교롭게도 다 코로나 펜데믹 시기에 찍었다. 감독님들이 나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다양한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진귀한 경험이다. 관객분들이 즐겼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산'이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길 원하는 지 궁금하다.
솔직히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버겁고 조심스럽다. 이순신 장군이라는 존재를 익히 알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전 세계 유명한 제독만큼 충분히 훌륭한 제독이 조선시대에, 우리 나라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한다.
관객분들께서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뜨거운 여름에 일주일 단위로 대작들이 개봉하는데 '한산'은 물론 다양한 영화들을 예전처럼 편안하게 극장에서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한다. 영화를 볼 때는 영화 자체로 스트레스를 날리시고 무더위를 날릴 수 있는 시원한 액션 전투 신도 함께 즐겨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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