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ㅣ 강일홍 기자] 조용필은 우리 가요계에 살아있는 역사, 전설로 통하는 가수다. 1980년대 이후 처음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등장시킨 그는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에 걸맞게 '가왕(歌王)'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호칭보다는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로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 고희의 나이에 접어든 조용필(70)이 최근 새 앨범에 대한 계획을 밝힌 가운데 그의 공연 재개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소속사 YPC프로덕션 측에 따르면 조용필은 올해 안에 새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다. 2013년 '헬로' 이후 9년 만으로 현재 곡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는 69년 '화이브 핑거스'를 결성해 미8군 무대에서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했고, 68년 록그룹 애트킨즈로 데뷔했다. 김트리오, 조용필과그림자 등 밴드를 거쳐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 히트로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 수 많은 히트곡과함께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다.
80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은 국내 가요계 사상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이후 최초 누적 앨범 1000만 장, 일본 내 한국가수 최초 단일 앨범 100만 장, 한국가수 최초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공연 등 숱한 기록을 세우며 '가왕' 명칭을 얻었다.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도 인생곡은 그의 존재감을 세상에 널리 알린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이곡은 여러 밴드를 거친 뒤 75년 솔로로 전향하면서 발표한 트로트풍 음악으로, 당시 재일교포 고국방문과 맞물려 열기가 달아올랐다. 부산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퍼졌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사 1절)
사실 이 곡은 탄생과정에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작곡가 황선우가 69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썼다가 통영 출신 가수 지망생 김해일에게 주면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로 바꾼다.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김해일은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71년 명동 대연각 호텔 화재사고로 사망한다.
황선우는 72년에 이 곡을 다시 김트리오의 멤버였던 조용필에게 준다. 본래 제목이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다시 바꾸고 가사도 일부 수정했다. 이 때도 곡은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는데 4년 후인 1976년 조용필이 빠른 템포로 편곡하고 가사의 일부를 수정해 공전의 히트를 친다.
조용필은 이 곡을 다시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로 편곡해 조용필 정규 1집(1980년)에 수록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바로 이 버전이다. 이후에도 다양한 곡들을 직접 썼고, 다른 작곡가에게 받은 곡이라도 편곡을 많이 해 가요계에 싱어송라이터라는 개념을 확립시킨 주역이 됐다.
조용필은 락 음악과 발라드 음악, 트로트 음악 또는 '강원도 아리랑'처럼 한국 민요를 리메이크하는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해 내며 다양한 연령층을 확보한다. 이전까지 가요계 최고 인기를 누리며 쌍벽을 이룬 남진과 나훈아의 아성을 깬 뉴페이스 국민가수로 우뚝 올라선다.
86년 일본에 진출해 발표한 앨범 '추억의 미아 1'이 100만장이상 판매하는 대성과를 거두며 그 해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한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8년에는 10집 수록곡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가 대박을 터뜨린다. 이 중 '서울 서울 서울'은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곡으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오랜 공백기를 가진 조용필은 올 하반기를 목표로 10곡 이상 담은 정규 앨범 발표를 위해 다양한 곡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중단된 공연 투어 기대감도 높여주고 있다. 소속사 측은 "오랜만의 활동인 만큼 다양한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