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원에 장렬한 최후…저는 행복했어요"
[더팩트 | 유지훈 기자]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는 악역들의 러브라인이라니. 뜨악할 법도 한데 한 커플이 최근 그 편견을 깼다. 악인에게도 나름의 사정과 순애보가 있는 법이다. 정다은은 선배 김성오와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며 시청자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정다은은 최근 종영한 tvN 월화드라마 '루카 : 더 비기닝'(극본 천성일, 연출 김홍선, 이하 '루카')에서 유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는 2회에 첫 등장해 주인공 커플 지오(김래원 분) 하늘에구름(이다희 분)을 맹렬하게 추격해나간다. 시선을 빼앗는 총천연색 빨간 머리, 서슴없이 거친 말을 뱉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시청자가 마주한 그의 첫인상이다.
"한여름에 촬영을 시작했어요. 염색은 한 5월쯤 했던 것 같아요. 원래부터 빨간 머리 설정은 아니었어요. 감독님과 작가님이 판타지스러운 캐릭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선 개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대요. 의상부터 헤어까지 여러 가지를 준비했어요. 처음에는 와인색이었는데 '이걸론 부족하다' 하시더라고요. 결국 빨간 머리로 합격을 받았죠."
"무엇보다 머리를 유지하는 게 가장 큰 난관이더라고요(웃음). 머리가 조금이라도 자라면 뿌리 염색을 해야 하고 2주마다 다시 전체 염색을 하고. 머리도 항상 컬러 샴푸로 감았어요. 덕분에 제 집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빨간색으로 변했어요. 화장실부터 베게까지 전부요. 덕분에 아직도 제 베게는 빨간 얼룩이 남아있어요."
그저 악랄하기만 한 캐릭터가 아니다. 유나는 슬픈 전사를 가지고 있다. 군인이었던 그는 훈련 중 총기 오발 사고로 5명을 죽여 사형을 받는다. 여기에 사로고 한쪽 다리까지 잃고 만다. 이후 "사형을 면하는 대신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김철수(박혁권 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실 오발사고는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김철수의 계략이었다. 그는 그 사실도 모른 채 같은 함정에 빠진 이손(김성오 분)과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악역을 하더라도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였어요. 유나는 계략 때문에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었는데 그게 장면과 대사로 충분히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저 역시도 그런 사정을 최대한 이해하면서 연기하려고 했어요. 애청자분들은 공감할 거예요. 지오 구름보다 유나와 이손이 더 불쌍한 처지에 있었어요. 정의롭고 착했던 유나가 그 때문에 반항의 의미로 빨간 머리로 염색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유나는 류중권(안내상 분) 덕분에 신체 개조로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개조된 다리는 이전보다 더 강력해져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모했다. 그래서 그의 주특기는 무게가 실린 괴력의 발차기다. 영화 '마녀'에서도 긴머리 역을 맡아 화려한 액션을 보여줬던 정다은은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고 화려한 몸짓을 보여준다. "전에는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액션인데 이제는 욕심마저 생긴다"며 미소 짓는 정다은에게서는 어떤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발이 조금만 더 찢어졌다면. 내가 시멘트 바닥을 더 잘 굴렀다면. 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돼요(웃음). 액션의 끝을 보고 싶어졌어요. '마녀' 때 4~5개월 정도 트레이닝을 받았고 '루카' 초기에는 한달 정도 액션 스쿨을 다니면서 다시 감을 살렸어요. 더 연습하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계속 나갈 수가 없어서 현장에서 감독님과 합을 맞춰보고 했어요. 이제 사람들도 제가 액션을 하는 게 익숙해졌는지 주변 친구들이 놀랐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심지어 칭찬에 인색한 엄마도 '너 액션 잘하더라, 점점 늘더라'고 하셨어요."
앞서 언급했듯 '루카' 속 정다은의 가장 큰 활약은 김성오와의 러브라인이다. 지오와 구름만 보면 죽일 듯 달려들지만 단둘이 있는 순간에는 어떤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느덧 유나는 이손에게 조직에서 벗어나 같이 새 삶을 살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둘의 러브라인은 예상을 벗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청자에게 이질감을 주진 않았다. 누군가의 계략으로 삶의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장면들은 이렇다 할 스킨십 없이도 짙은 여운을 나누기 충분했다.
"유나와 이손은 군 생활을 했고 누명 때문에 악인이 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서로를 측은하게 바라봤고 어느덧 공감하게 됐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로맨스가 잘 나올 줄은 몰랐어요. 대본을 보면서 '어! 잠깐. 이게 뭐지?' 했어요(웃음). 하지만 이전 장면들에 나왔던 묘한 기류들이 명확해져서 좋았어요. 김성오 선배는 작품에서는 무섭지만 카메라가 꺼지면 참 다정한 사람이에요. 위트 넘치셨고 늘 제 긴장을 풀어주셨어요."
'루카' 초반 촬영 당시 정다은은 유나가 금새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조급한 마음을 품은 채 촬영은 계속됐고 유나는 10회까지 살아남았다. 나름의 활약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캐릭터의 마지막 순간은 평소 존경하던 선배 김래원과의 남다른 연기 호흡으로 완성됐다. 정다은은 "마지막 촬영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그래도 선배와 함께라 행복했다"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처음 예상보다 제가 활약할 수 있는 장면이 많았어요.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코로나와 폭우 때문에 일정이 미뤄졌고 그때마다 혼자 '다행이다' 했어요(웃음). 결국 마지막 촬영 날이 왔는데 평소 지루하게 천천히 흘렀던 대기 시간이 그날은 어찌나 빠르던지 몰라요. 늘 멋진 최후를 꿈꿨는데 김래원 선배 덕분에 그 꿈을 이뤘어요. 팬심을 좀 보이자면 마지막에 보여주셨던 작은 배려를 소녀의 마음으로 잘 간직하고 있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몇몇 팬들은 정다은을 '남성스럽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그는 그저 불필요한 꾸밈이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잘 모르는 대중도 있겠지만 그는 걸그룹 투아이즈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해 SBS '웃찾사'에서 개그맨들과 직접 코너를 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고 이제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차세대 '액션 퀸'이 됐다. 진솔함에 나름의 도전정신까지 갖췄으니 우리는 앞으로 그의 활약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루카'는 5년, 10년 후에 생각해도 저에게 자신감을 찾게 해준 작품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 같아요. 많이 배웠고 자존감도 높아졌죠. 지금까지 그랬듯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요. 당장 매진해야 할 건 연기겠죠. 우선의 목표는 이왕 시작한 액션으로 정점에 서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우리나라 액션 잘 소화하는 여자 배우에 누가 있었지?' 하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요. 앞으로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