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도청 장면…'원맨쇼' 했죠"
[더팩트 | 유지훈 기자] 영화배우는 인내의 직업이라고들 한다. 원하는 작품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현장에서는 자신이 연기를 펼칠 차례가 올 때까지 대기한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쳐도 편집을 비롯한 후반작업과 개봉 시기 조율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런데 아무리 인내가 미덕인 직업이라고 하지만 3년은 너무 길지 않을까.
정우는 오는 25일 개봉하는 영화 '이웃사촌'(감독 이환경)으로 관객을 만난다. 작품은 이미 지난 2018년 2월 말 촬영을 마쳤다. 정우도 그의 팬들도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년이 지나 꺼내고 싶었던 촬영 현장 뒷이야기마저 가물가물해질 때 즈음 정우는 취재진 앞에서 다시 그 기억을 되짚었다. 디테일은 다소 부족했을지라도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했다.
"배우가 기다림의 직업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참 이제야 몸소 느끼고 실감이 됐어요. 드디어 영화를 봤는데 촬영 당시 뜨거웠던 열정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혼자 했던 마음고생 같은 게 느껴졌어요. 그게 또 스크린에 다 잘 담겨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고요."
'이웃사촌'의 개봉이 3년이나 밀린 이유는 정우와 호흡을 맞추는 또 다른 주연 배우 오달수가 2018년 초 '미투'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3년 기다림의 소회가 곧 오달수와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정우는 다소 조심스러웠다.
"3년 동안 개봉이 밀렸는데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죠. 참 안타깝기도 하고요. 오달수 선배의 연기력은 다들 잘 아실 거예요. 후배로서 말하긴 민망하지만 참 호흡이 좋았어요. 저에겐 참 감회가 남다른 영화가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이웃사촌'이 그랬고 '흥부'(감독 조근현) 때는 (김)주혁 형 때문에 참 마음 아팠죠. 그래도 모두 개봉됐다는 데 그저 감사해요."
'이웃사촌'은 1985년 독재정권 시절 좌천 위기의 도청팀장 대권(정우 분)이 자택 격리된 정치인 의식(오달수 분) 가족의 옆집으로 위장 이사를 오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대권 역의 정우는 처음엔 다소 냉혈한 같지만 점차 그 차가운 면모를 벗고 대중의 기억 속 따뜻한 얼굴이 된다. 구수한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빠이자 정의감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소시민 정우가 연신 미소를 안긴다.
"감독님이 대권의 첫인상이 냉철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모습이요. 그런데 그 안에는 투박하고 또 감상적이기도 해야 했어요. 도청 장면이 많은데 도청이라는 게 한정된 장소에서 하는 거잖아요. 헤드폰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웃음) 그걸 상상하면서 시선 처리와 눈빛 떨림 숨소리를 다 연기해야만 했어요. 마치 원맨쇼 하듯이요."
작품 속 정우의 시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극본 이우정, 연출 신원호), 이에 앞서 자신의 얼굴을 알린 영화 '바람'(감독 이성한)은 배경이 1990년대였다. 60년대의 '쎄시봉'(감독 김현성), 70년대의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 등에 이어 '이웃사촌'은 1985년이 주 무대다. 정우가 시대극을 좋아해서 쌓인 필모그래피는 아니다. 그가 그저 "발이 땅에 닿는 영화를 좋아해서"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에요.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 뭔가 모르게 더 재미있어요. 특히 추억이나 향수 이런 걸 좋아해서 택하게 된 작품들이에요. 그런 게 참 좋아요. 붕 뜨지 않고 발이 땅에 닿아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요. 감독님들도 그런 영화에 저를 많이 찾아주시는 것 같아요. 평범하고 네추럴 한 이미지? 제가 봐도 제 얼굴이 미래에서 온 느낌은 아니에요.(웃음)"
스크린 속에서는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정우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배우들이 작품 홍보를 위해 출연하는 예능에서의 행보도 전무하다.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도 운영하지 않는다. 정우는 그 모든 게 철저한 자기 검열도 막연히 꿈꿨던 신비주의도 아니라며 털털한 웃음과 함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냥 별생각이 없을 뿐이에요.(웃음) 예능에 나가면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힘들었고요. 이번엔 좀 달라요. 어려운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니까 잡아 둔 스케줄이 몇 개 있어요. 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던 것은 뭔지 모르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저보다 많은 것을 경험한 선배들이 정말 많아요. 배우로서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말을 잘 안 하게 돼요. 그래도 이제 마흔이 넘었으니까 조금씩 꺼내요. 예전이라면 지금 이런 말도 안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타고난 배우가 아닌 것 같아요. 매 작품마다 정말 발악을 해요. 제가 테크니션이 아니다 보니 여유를 부릴 줄 몰라요. 그래서 진정성 하나로 밀고 나가니까 제 자신을 계속해 괴롭히더라고요. 사람들이 제 연기가 좋다고 하면 좋아서 기뻐 날뛰고 어떤 때는 바닥을 보고 혼자 추락하고 그래요."
작품 속 정우처럼 현실의 정우 역시 발이 땅에 닿아있다. 침묵하고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홀로 노력하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이웃사촌' 개봉을 기다리는 3년 동안 정우는 그 태도를 조금 고쳐보기로 했다. "연기를 위한 혼자만의 노력이 어쩌면 이기심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에서다.
"연기 하나만 바라보며 현장에 있었어요. 연기에만 몰두했고 주변에 신경을 전혀 못 썼어요. 이제는 좀 돌아보고 조금 한 발 떨어져서 전체를 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욕심만큼 되지 않는 게 연기인 것 같아요. 경력이 쌓였고 사람 정우의 나이도 많아졌죠. 이제 조금은 비워내고 다른 것들을 하나씩 채워가고 싶어요."
"이제 40대가 됐어요. 예전에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매일매일 그냥 저를 채워가고 싶어요. 어떤 목표 없이 오늘 이 순간을 채우는 일이요."
2018년 2월 개봉한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 이후 멈췄던 정우의 필모그래피는 다시 하나둘 쌓인다. 이미 촬영을 마친 영화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감독 김민수)와 '뜨거운 피'(감독 천명관)가 대기 중이다. 각각 형사물과 정통 느와르를 표방했으니 조금은 붕 뜬 색다른 정우를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최근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카카오TV 웹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X'(감독 이태곤) 촬영에 매진 중이다. 긴 기다림이 있었지만 정우는 그 나름의 결실을 눈앞에 뒀다.
tissue_hoon@tf.co.kr
[연예기획팀 | ssent@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