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없는 캐릭터…낯선 이정은 발견했죠"
[더팩트 | 유지훈 기자] 연극 무대에서 실력을 쌓고 굵직한 작품에서 조 단역을 맡아 얼굴을 알린 후 대표작을 만나 스타덤에 오른다. '명품 연기'라는 찬사가 따르는 배우들의 공통 서사다. 이제는 당연한 공식처럼 자리 잡아 감흥이 없을 법도 한데 이정은을 보니 또 달리 느껴진다. 김혜수가 그를 지칭해왔던 말처럼 참으로 "경이로운 정은 씨"다.
이정은은 지난 12일 개봉한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을 통해 관객들을 만난다. 작품은 삶의 벼랑 끝에 선 형사 현수(김혜수 분)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세진(노정의 분)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담는다. 이정은은 사건의 핵심을 쥐고 있는 목격자 순천댁 역을 맡는다. 이렇다 할 대사 한마디 없이 몸짓과 표정 그리고 비뚤비뚤한 손글씨로 널찍한 스크린에서 연신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자극적인 감정을 배우가 표현할 때 시선이 가잖아요. 사람들은 재미가 없는 걸 잘 못 봐요. 그래서인지 그 반대인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느린 영화였고 흥미를 느꼈어요. 지금까지 말 많은 캐릭터를 해왔어요. 술자리에 가면 열심히 떠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조용히 술만 마시는 사람도 있어요. 후자에 관심이 갈 때가 있어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감정의 소용돌이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요. 저도 그런 사람에 흥미를 느끼는 시기였어요."
이정은은 목소리 연기의 대가다. 영화 '옥자'(감독 봉준호) 속 옥자, '미스터 주: 사라진 VIP'(감독 김태윤)의 고릴라의 울음이 그의 보이지 않는 열연으로 탄생했다. 그런 그가 이번 작품에서 목소리를 잃은 캐릭터다. 순천댁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지만 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수사를 위해 던지는 현수의 질문에 무심한 표정, 짤막한 손글씨로 답할 뿐이다. 줄곧 작품에서 수다스러웠던 그가 침묵한 이유는 "목소리가 아닌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예전부터 제 목소리가 장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연기할 때 들었던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아요. '네 목소리 말고 너를 보여줘'였고 참 좋았어요. 배우가 대사에 진심을 녹일 때도 있지만 그저 언어적 재미를 주는 데만 머물기도 해요. 그래서 언어를 배제한 채 연기해보고 싶었고 이 작품을 만났죠."
대사를 잃은 이정은은 이를 대신할 것들을 찾아 나섰다. 표정이나 몸짓을 더 할까 고민했으나 결국 사족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대신 상대 캐릭터의 말에 그저 경청하는 태도,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의 질감,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글씨의 모양새에 집중했다. 모든 걸 다 버려내니 인간 이정은이 스크린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됐다.
"대사를 잃으면 무언가를 잃으면 더하고 싶기 마련이에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결정을 냈어요. 더하지 않으니 낯선 얼굴이 나오더라고요. 저로서도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대신 공부를 좀 많이 했어요. 목소리를 잃었지만 어느 기관을 다쳤는지에 따라 소리가 달리 나온다고 해서 반영했어요. 후시 녹음도 7시간이나 했고요. 글씨는 시골 어머니들의 시집을 참고했어요. 책으로 나온 게 있는데 원본을 찾아서 연습했죠."
끊임없이 탐구하는 연기의 정석이다. '옥자'(감독 봉준호)에서 옥자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내기 위해 며칠간 돼지와 관련된 영상만 들여다봤다. 이번 작품에는 목소리의 의학적인 접근에 시골 어머니들의 비뚤비뚤한 글씨체 필사까지 거듭했다. 그 노력의 비결을 물으니 "내가 부족해서 그랬을 뿐"이라며 겸손한 면모를 보였다.
"형사가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을 때 시체랑 똑같이 누워있기도 하잖아요. 저도 비슷한 거예요. 비빌 구석이 없으니 뭐라도 해보는 거죠.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제가 천재가 아니니까 보따리를 싸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죠. 상상력이 풍부한 배우들을 보면 참 부러워요. 저는 부족하니까 탐문하고 취재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요."
김혜수는 촬영 기간 동안 이정은을 "경이로운 정은 씨"라고 불렀다. 그가 뿜어내는 사람 배우로서의 아우라가 남다르고 따뜻하다고 느껴서다. 동갑내기 친구 김혜수의 칭찬에 그는 연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오는 말이 고왔더니 가는 말은 더 고왔다. 김혜수를 향한 칭찬 릴레이가 이어졌다.
"제가 사실 좀 퉁명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런데 혜수 씨가 만들어주는 분위기 덕분에 좀 풀어졌어요. 전부터 들었던 말이 혜수 씨와 함께하는 현장은 '우리 함께!'의 느낌이래요. 이번 현장도 그랬어요. 그 사람을 향한 스태프들의 어떤 마음이 느껴져요. 오랜 세월 배우로 활동한 연륜도 느껴져서 자꾸만 마음이 가고 존경까지 생기더라고요. 혜수 씨 덕분에 데뷔한 배우가 많대요. 그냥 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기생충'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배우가 됐다. 때로는 그 시선들이 부담이 돼 이정은을 짓누르기도 했다. '평범한 연기는 잘 못 한다'는 악플에 잠을 뒤척였지만 또 훌훌 털어냈다. "못하니까 더 잘하려고 연기하는 것"이라며 기분 좋게 웃는 모습에서 인간 이정은으로서의 탄탄한 내실을 엿볼 수 있었다.
"'기생충' 이후 부담도 느끼지만 저는 계속 연기할 거에요. 계속 잘할 수는 없겠죠. 때로는 엎어지겠지만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래요. 이런 말씀 부끄럽지만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잘할 때도 언젠가 제가 못 할 때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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