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넘은 나이, 여전한 소녀 감성 속 음악적 완성도 깊어져
[더팩트|강일홍 기자] 진미령(62, 본명 김미령)은 소녀의 감성을 가진 가수다. 중년의 나이에도 그의 가요 필모그래피에는 여전히 음악적 완성도와 깊이가 다른 노래들로 가득 차 있다. 세월을 비껴간 듯 데뷔 44년이 흐른 지금도 한결 같은 목소리, 짙은 애절함으로 사랑받고 있다.
'남 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 차라리 저 멀리 둘 걸 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행여나 찾아 올까봐 가슴이 사랑을 잊지 못해/ 이별로 끝난다 해도 그 끈을 놓을 순 없어 너와 난 운명인 거야'('미운 사랑' 가사)
'미운 사랑'은 리듬에서 풍기는 느낌만으로 색깔이 배어나는 노래다. 원래는 '체념'(송강호 작사 작곡)이란 곡이었지만 진미령이 자신의 느낌과 정서에 맞게 전체 가사를 바꿨다. 그가 2012년 발표한 뒤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곡은 임영웅이 최근 KBS2 예능 '불후의 명곡'에서 열창한 뒤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아무리 유명 작곡가들이 쓴 곡이라도 꼭 그대로 부르는 건 아니에요. 저 역시 저만의 방식과 스타일을 강조하는 편인데 결과는 좋더라고요. '미운 사랑'은 원곡자의 양해를 구해 제가 가사를 새로 쓰고 일부 편곡을 했어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반드시 제 느낌이 살아있는 곡이어야 저부터 만족하니까요."
진미령은 76년 '잊지는 못할거야'로 데뷔했다. 이듬해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해 당시 여고생 천재 작곡가로 불렸던 故 장덕 작사 작곡의 '소녀와 가로등'이 뜨겁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이 노래는 2년 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하얀 민들레'와 함께 그의 영원한 인생곡이 됐다.
한때 그는 방송활동을 중단하면서까지 요리공부(프랑스 르 코르동 블루 숙명여대 자매학교)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미운 사랑' 이후 '한 잔의 눈물' '당신을 사랑해' 등이 꾸준한 반응을 내면서 '제3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7일 서울 청담동 그의 사무실이 있는 김일태 화백의 갤러리 '아트뱅크'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미운 사랑'은 트로트보다는 발라드 쪽에 가까운 리듬이다. 요즘 트로트 열기와 함께 유튜브 등 SNS를 통해 더 뜨겁게 확산하며 재조명되고 있는데 어떤 이유라도 있다고 생각하나?
말씀하신 대로 원래 제 음악적 토대는 발라드예요. '미운 사랑' 이전까지 대중에 알려진 제 노래는 모두 발라드 풍 곡이었어요. '미운 사랑'이 트로트로 방향을 전향한 첫 곡이라 나름 변화를 줬는데도 발라드 느낌이 살아있는 건 그 때문이에요. 또 과거 제 노래들과 달리 입소문으로 히트한 곡인데요. 사실 '세월호' '메르스' 등 사회적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음반 활동은 거의 못 했거든요. 작곡자인 송강호 씨가 '전국노래교실 넘버3' 안에 드는 영향력이 있다 보니 주부들 사이에 자주 불리게 됐고, 유튜브를 통해 급속히 전파됐어요.
-'소녀와 가로등'(77년) '하얀 민들레'(79년)는 80년대 중반까지 최고 히트곡이었다. 가수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돌연 미국 이민을 떠난 이유가 궁금하다.
요즘 기준이라면 의아해 하실 분이 많을 거예요. 최정상 가수로 발돋움해 한창 인기를 누릴 시기에 돌연 은퇴를 하고 미국행을 선택했으니까요. 지금도 혹시 무슨 스캔들이라도 있었던 게 아닌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저는 가정 형편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비교적 안정적인 집에서 자랐죠. 가수로는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만큼 주목을 받았는데 그냥 스케줄에 얽매여 사는 게 싫었어요. 가수 중심(스타시스템)의 완벽한 매니지먼트도 아니었고요. 마침 미국에 계신 외삼촌이 엄마를 초청을 했고, 엄마가 다시 저를 초청해 훌훌 털고 떠날 수 있었어요.
진미령은 한창 인기를 누리던 81년 미국으로 떠나 국내 컴백까지 긴 공백기를 갖는다. 다름 아닌 미국에 머문 10년의 시간이다. 처음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어머니(함영희씨)와 함께 비행기를 탔다. 계획대로 도착하자마자 초급대인 LA 시티칼리지에서 회계(Account)를 전공한다. 하지만 경제적 사정이 녹록치 않아 재봉공장을 거쳐 가구점(보르네오 버몬트매장)을 다니며 돈벌이를 병행해야 했다. 나중엔 수입이 더 좋은 보험회사에 취직하기도 한다. 그는 "당시 LA 교민들이 다 알아보고 나이트 클럽에 출연하면 고생 안 해도 된다고 권유했지만 '노래 할 거면 한국에서 오지도 않았다'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대중가수한테 10년 공백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미국에서 커리어우먼으로 나름 자리잡고 살았는데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었나?
네. 결정적 계기가 있었죠. 89년인가 90년도 쯤에 한국의 인기가수들이 LA에 교포 위문공연을 왔어요. 故 이주일 선생님을 비롯해 조용필 씨 등 함께 온 몇몇 선배님들은 제가 국내 활동하던 시절부터 유독 예뻐해주셨던 분들이에요. KBS '젊음의 행진'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뵙던 분들이라 반가운 마음에 일부러 공연장을 찾아갔는데 더 반갑게 맞아주시더라고요. 선배님들이 한결같이 '한국에 다시 돌아오라'고 했어요. 마침 급속히 발전한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던 참이었어요. 그 바로 얼마 전인 88년 서울올림픽 때 통역사로 잠깐 자원봉사를 했거든요. 선배님들의 칭찬과 부추김에 마음이 흔들렸죠.
그는 회계공부를 시작하기 앞서 랭귀지스쿨에서 정식 영어공부를 했다. 이후 외국 보험회사(미네소타 뮤추얼라이프)에 오래 근무하며 완벽한 현지어 구사가 가능하다. 올림픽 통역자원봉사는 컴백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교관이 꿈이었고 어른이 되면 각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다"면서 "우연찮게 가수가 돼 꿈을 접었지만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작지만 뭔가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고 했다.
-음악적 소질은 타고나야 하는데 특이하게도 원래 가수가 꿈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과정에 숨은 사연이라도 있나.
가수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어요. 노래에 소질이 있는 것도 몰랐고요. 말씀드린 대로 외교관이 꿈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머지않아 중국 대륙이 대세 국가로 떠오른다'며 저를 서울 연희동에 있는 중화권 학교에 보내셨어요.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대학도 대만 유학을 준비했고요. 대만은 가을 학기(8월 중순)라서 3월에 고등학교 졸업을 한 뒤 6개월 정도 공백이 생겼어요. 이때 장욱조 작곡가를 만나 팝송 개인교습을 받게 됐는데 당시 가요계 최고 매니저로 불리던 타미김(본명 김재종)이란 분한테 우연히 발탁이 됐어요. 이분이 오아시스 레코드에 소개해주셔서 얼떨결에 가수로 데뷔하게 된거죠. 결국 대학 진학은 포기하게 됐고요.
가요계가 먼저 손을 내밀어 뛰어들었지만 정작 그는 데뷔곡으로는 히트를 내지 못했다. 그가 부른 '잊지는 못할거야' '아쉬움' 등은 훗날 가수 정윤선 김미성이 불러 각각 히트한다. 그는 "처음 매니저 분과 방송국에 갔더니 PD 분들이 들어보시고는 제 이미지나 분위기와 안 맞으니 '차라리 발랄 경쾌한 노래를 부르는 게 좋겠다'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고 말했다. 데뷔 이듬해 진미령은 싱어송라이터 고 장덕이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을 들고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한다. '소녀와 가로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진미령은 데뷔 1년 만에 신인상을 포함해 각종 가요상을 휩쓴다.
-데뷔한 지 1년 만에 최고 인기를 누리는 가수가 됐고, 당시 CM 등 멀티엔터테이너로 주가를 높였다. MBC 라디오 프로그램 '싱글벙글쇼' DJ로 활동한 이력도 갖고 있지 않나.
여배우 린다 카터가 주인공을 맡은 '원더우먼'이란 TV 외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당시 중고등학교를 다닌 지금의 50~60대라면 다들 기억하실 텐데 한마디로 엄청난 인기였죠. 매력적인 여배우의 활약과 히어로 원더우먼의 탄생 이야기가 박진감이 넘쳤어요. 드라마 인기와 더불어 원더우먼이 변신하는 순간 BG로 깔리는 주제곡도 화제였죠. 이 번안곡의 목소리가 바로 저예요. 그땐 CF보다 라디오 CM송이 인기였는데 제가 단골이었어요. 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싱글벙글쇼'에서는 남자 DJ를 바꿔가며 진행을 했을 만큼 주목을 받았으니까요.
진미령이 짧은 시간 내에 가수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역시 故 장덕과의 인연이다. 진미령이 노래하고, 장덕은 긴 생머리의 빵떡 모자, 진달래 재킷에 보타이를 메고 무대 위에서 직접 악단을 지휘했다. 그는 "장덕이 나보다 3살이나 어렸지만 작곡가로 당당하게 무대 위에 선 그때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이 곡이 히트한 뒤 가장 스케줄이 바쁜 가수로 발돋움한다. 이듬해인 78년부터 '싱글벙글쇼' DJ로 발탁됐고, 당대 인기를 누리던 고 이주일, 고 박상규, 가수 서수남 등이 파트너인 남자 MC로 번갈아가며 맡아 호흡을 맞추게 된다.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이란 곡은 발표 이후 결혼식 축가로도 많이 불리지 않았나. 노래에 담긴 특별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인가.
일본에서는 초경하는 날 아버지가 딸에게 장미꽃을 선물한다고 해요. 이 곡은 2004년에 발표했는데 대중적 히트는 못했어도 노래 속에 담긴 의미 때문에 은근히 반응이 좋았어요. '하얀 민들레'의 후속이라고 보면 되는데 가사만으로 두 곡이 쌍을 이루고 있어요. '하얀 민들레'가 사랑을 알고 부모님 곁을 떠나는 소녀의 심정이라면,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은 세월이 흘러 자신의 딸이 결혼하는 날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또 다른 느낌의 사랑과 행복을 느낀다는 내용을 담았어요. 어찌보면 두 노래는 하나의 가사로 묶여 완성되는 의미가 있어요. 결혼식장에서 이 노래를 축하곡으로 부르면 신부들이 가슴을 들썩이며 많이 울었죠.
'나 어릴 땐 철부지로 자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떠나는 것을/ 엄마 품이 아무리 따뜻하지만/ 때가 되면 떠나요 할 수 없어요/ 안녕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며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 처럼 돌아 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하얀 민들레' 가사)
'그때 나는 철이 없이 웃고만 서 있었네/ 웨딩마치가 울리고 식장에 들어설 때/ 내 손 꼭 쥔 아버지 가늘게 떨고있어/ 난생 처음 보았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버지 모습/ 나도 같이 주저앉아 울고 싶었어/ 내일이면 나는 쉰이라네 딸 아이가 벌써 시집을 간다/ 우리 엄마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그 옛날 엄마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아'('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 가사)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하이힐을 신고 다닐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마지막으로 건강 비결이나 평소 스타일이 궁금하다.
보기와 달리 성격은 낙천적이고 화통한 편이에요. 화끈하고 통큰 여자란 말도 많이 들어요. 웬만한 걸로는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의 목표를 세우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한창 잘 나가던 가수생활을 단호히 포기한 것이나, 요리 공부를 위해 1년간 모든 방송활동 스케줄을 중단한 것들은 이런 성격의 단면이라고 보시면 되요. 건강관리는 젊어서부터 늘 해오던 방식을 지금도 변함없이 실천하고 있어요. 매일 스쿼트 100개, 윗몸일으키기 100개를 하는데 배와 하체가 든든해야 힘있는 노래를 할 수 있거든요.
진미령은 2남 3녀 중 셋째다. 아버지 작고 직후 귀국해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와 자신 외엔 모두 미국 LA나 라스베이거스, 호주 등 해외에 거주 중이다. 그는 "보기엔 가족 중 제가 가장 여려보이는데 사실은 가장 대찬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 2006년 전문 산악인 허영호를 따라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를 등반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기초체력을 키우기 위해 한동안 남한산성 트레킹부터 검단산 등 서울 근교 산행을 섭렵했을 만큼 끈기의 여장부로 정평이 났다. 이혼 직후 뭔가 자신을 다잡을 계기가 필요했다고 한다.
화교 학교를 다닌 진미령은 한동안 화교로 알려졌으나 이는 와전된 얘기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고, 다만 외할머니가 화교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광복군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김동석 예비역 육군 대령이다. 이북5도위원회 함경북도지사를 역임했고 10년 전 작고해 동작동 국립묘지 안장됐다.
진미령은 중국어 외에도 영어와 일본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해 성룡 주윤발 홍금보 유덕화 이연걸 등 중화권 배우들이 내한할 때마다 단골 통역을 맡았다. 나스타샤 킨스키, 브랜다 리 등 할리우드 배우나 팝 가수들의 영어 통역을 했고, 진추하와는 KBS 특집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진미령은 "돌고돌아 제자리로 왔지만 음악적 열의는 더욱 깊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미운 사랑' 이후 선보인 '한 잔의 눈물' '당신을 사랑해' 등이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환갑을 넘겨 가수로 인생 후반전을 다시 연 그는 자신감도 남달라보였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아직도 불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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