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홍의 스페셜인터뷰94-김혜영] "애인 같은 싱글벙글쇼, 아직 결별 못 해"

요즘 슬퍼보이지 않으려고 표정관리 많이 해요. 라디오 싱글벙글쇼 마이크를 33년 만에 내려놓은 김혜영은 긴 시간 애정이 깊었던 만큼 억지로 정을 떼야한다는 게 얼마나 아픈 건지 실감한다고 말했다. /이효균 기자

33년 만의 라디오 정년퇴임, "따뜻한 격려 가슴속에 담아"

[더팩트|강일홍 기자] 김혜영(58)은 가슴이 따뜻한 방송인이다. 늘 밝고 환한 미소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을 가졌다. 비결은 끝없는 긍정 마인드다. 그는 누구라도 한번 인연을 맺으면 스스로 내뿜는 선한 기운으로 배려와 양보, 감사와 고마움을 함께 공유한다.

그는 유난히 눈물이 많기로도 연예계에 정평이 나 있다. 평소 호탕하고 쾌활하게 웃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잔정이 많기 때문이다. 또 나보다는 이웃의 작은 슬픔에 더 크게 반응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소소하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감동사연도 많다.

무명 통기타 가수 겸 개그맨 김철민의 슬픈 가족사는 김혜영의 도움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해 김철민의 폐암 투병소식이 알려진 뒤엔 더 애틋한 마음으로 교감했다. 김철민은 "저는 아무런 역할도 해드린 적 없는데 단지 후배라는 이유로 힘들 때마다 도움을 주신 혜영이 누나는 천사"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김혜영은 81년 연극배우를 거쳐 MBC 공채 코미디탤런트 3기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어느덧 데뷔 39년, 연예계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한 그에게 라디오는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33년간 간판 DJ를 맡아 청취자들과 동고동락해온 '싱글벙글쇼'는 분신과도 같다.

"마치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진 느낌이죠.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떠났어도 욕할 수 없는 그런 심정 말이에요. 새로운 연인이 생겨도 금방 상처가 아물 것 같진 않아요. 아주 오랜 시간 치유될 수 없는 아련한 연민 같은 것, 살면서 풀어가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싱글벙글쇼'를 떠난 뒤 그는 한동안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도 허탈함을 해소할 수 없어 긴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는 "언젠가는 헤어짐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면서 "이렇게 흔들릴 줄은 정말 몰랐다"고 했다. 짧지만, 그 사이 마음이 좀 정리 됐을까? 지난 19일 서울 상암동 <더팩트> 본사를 방문한 김혜영과 2시간 동안 스페셜인터뷰를 진행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에요. 김혜영은 인터뷰 내내 싱글벙글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먼저 다른 주제로 넘어가자고 말한 뒤에도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이효균 기자

-'싱글벙글쇼' 마이크를 갑작스럽게 내려놓은 뒤 많이 힘들었을 텐데, 표정은 매우 밝아보인다. 평소 성격과 스타일 때문인가?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저를 위로하느라 난리예요. 그래서 저도 표정관리를 하느라 신경을 많이 쓰죠. 되도록 슬퍼보이지 않으려고요. 강 기자님한테 그렇게 비쳤다니 대 성공이네요. 성격상 원래 안 좋은 일은 빨리 잊는 편인데 이번엔 좀 달랐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헤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애정어린 위로와 격려로 많이 추슬렀는데도 여전히 힘든 건 사실이에요. 그만큼 긴 시간 애정이 깊었다는 반증이겠죠. 억지로 정을 떼야한다는 게 얼마나 아픈 건지 실감하고 있어요.

김혜영은 강석과 국내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MBC 표준FM '싱글벙글쇼'(95.9MHz)를 33년간 진행했다. 지난 5월10일 오픈스튜디오 스페셜 라이브 고별 방송을 끝으로 잡은 마이크를 놓았다. 담담하게 이어진 그의 가슴 절절한 마지막 멘트는 청취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항상 그날이 오겠지, 그날 오면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오늘 그날이 왔다. 청취자 여러분과 이별을 고하는 그날,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 가슴 속 깊은 선물로 가져가겠다."

-'싱글벙글쇼'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청취자 입장에서도 아쉬움이 많다. 혹시 방송사에 서운함은 없는지 솔직한 속내를 듣고 싶다.

세상에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잖아요. 누구든, 어떤 만남이든 결국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 역시 '싱글벙글쇼'와 헤어지는 그날을 늘 마음 한편에 두고 살았고요. 청취자들과의 이별이 힘들다는 마음의 표현이 커서 방송사에 서운함으로 비칠 수도 있겠죠. 분명히 말씀 드리면 방송사에 대한 서운함은 '1'도 없어요. 아니, 감사할지언정 절대 서운해선 안돼요. 제가 처음 발을 들여놓은 방송사이고, 밉든 곱든 평생 마음에 담고 갈 친정 같은 곳이잖아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를 떠나면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MBC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33년간 자신을 지켜준 울타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첫 직장에 입사해 한눈팔지 않고 명예롭게 '정년'을 마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두 번째는 청취자에 대한 고마움이다. 30여년간 함께 해준 청취자들이 방송을 떠난 뒤에도 변함없이 보내준 위로와 격려는 두고 두고 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는 "개편 때마다 교체 위기가 왜 없었겠느냐"면서 "33년간 자리를 지킨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김혜영은 힘들 때마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건 역시 가족의 응원이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노고를 가슴 뜨겁게 인정해준 지인들한테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효균 기자

-'싱글벙글쇼' 마이크를 처음 잡았을 당시로 돌아가보면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때 아닌가. 인기 프로그램 DJ를 맡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계기가 있을 것 같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보니 세상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더 아름답다는 것을요. 저는 누군가로부터 늘 도움을 받았고, 그게 고맙고 감사해서 다시 누군가에게 베풀며 살고자 노력했어요. 데뷔 후 한동안 말괄량이 이미지였는데 항상 밝게 웃는 모습이 밉상은 아니었던 듯해요. 서세원 이문세 선배님들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거든요. 근데 그게 또 꿈에서도 그려보지 못한 '싱글벙글쇼' 메인 DJ 발탁의 밑거름이 됐어요. 저한테는 그야말로 행운이었죠.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DJ 발탁은 그에게 파격이라 할 만큼 행운이었다. 당시 남자 DJ는 강석이었고, 여자 DJ로는 권귀옥(6개월) 최미나(6개월)에 이어 배우 오미희가 바통을 이어받은 참이었다. 한데 오미희가 KBS 드라마에 캐스팅 되면서 3개월 만에 낙마했다. 그 때만 해도 방송사가 보이지 않는 경쟁구도와 자존심 때문에 타 방송 드라마 출연만으로 결격 사유가 되던 시기였다. 김혜영은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거쳐간 프로그램이라서 저한테 기회가 오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적극적으로 마음을 달래주는 청취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주로 어떤 반응을 어떤 방식으로 해주시는지 궁금하다.

방송을 하면서 청취자분들이 보내주시는 사연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정말 이렇게 많은 분들한테 오랫동안 깊은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그리고 진짜 서민들,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교감했다는 걸 새삼 느끼죠. 얼마 전 늘 다니던 동네 미용실을 갔는데 50% 할인해주셨어요. 목욕탕에선 아예 무료 서비스를 해주셨고요. 저를 위로하시겠다며 마음 써주신 거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감사히 받아들였어요.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들이잖아요. 우리 모두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됐으면 해요.

그가 하차 통보를 받고 힘들어했던 것 중 하나는 수십년 함께한 작가 PD 리포터 등 스태프와의 헤어짐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라디오 마이크를 놓은 뒤엔 뭉클한 감동을 많이 맛봤다고 한다. 남편과 두 딸은 물론 수많은 지인들이 그가 쌓아온 '수고'와 '노고'를 가슴 뜨겁게 인정했다. 그의 마지막 방송 때는 현숙 하춘화 등 동료연예인들이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 위로했다. 그는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을 지탱해주는 건 주변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마지막 방송 날 위로와 격려를 위해 찾은 임백천(왼쪽) 하춘화. 사진 위는 마이웨이 촬영 당시 개그맨 정준하와 폐암 투병 중인 김철민, 그리고 개그맨 옹알스 멤버들과 함께. /김혜영 제공

-라디오를 떠난 뒤 살던 아파트 내부 인테리어와 가구를 교체해 집안 분위기를 싹 바꿨다고 하는데 심경변화라도 생겼나?

여자는 원래 감성적이잖아요. 헤어 스타일만 바꿔도 기분 전환이 될 만큼 주변 변화에 민감해요. 결혼 후 30년 넘게 살고 있는 아파트여서 부분적으로 인테리어를 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이번엔 남편이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저를 위해 일부러 분위기를 산뜻하게 바꿔준 거라서 더 의미가 있죠. 직장에 다니는 큰 딸은 '낳고 키워주신 엄마한테 드리는 퇴직금'이라며 직접 모은 목돈을 선뜻 건네더라고요. 힘들 때는 가족이 가장 큰 원군인 것 같아요.

요즘 김혜영은 여의도 공원을 하루 두 바퀴씩 걷는다. 그는 "두 바퀴를 걸으면 7km 정도 되는데 걸으면서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반추하며 가족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다시금 깨닫는다"고 했다. 그는 또 "라디오 '싱글벙글쇼'를 끝내면서 정년퇴임한 분들의 심경을 절절하게 확인했다"면서 "바쁘게 일할 때는 몰랐는데 평생 몸담은 일터를 떠난 뒤에 허탈해진 마음을 달래주고 다잡아줄 수 있는 것도 결국엔 가족 뿐"이라고 말했다.

-최근 새로 기획 중인 TV 새 예능프로그램 진행자로 변신을 벼르고 있다. 방송을 떠나 자연인 김혜영으로 혹시 당장 계획하는 일이 있다면 밝혀달라.

하하하, 강 기자님도 저를 아예 은퇴한 사람처럼 보시는군요. 하긴 워낙 오래 했던 프로그램을 놓으니 저도 가끔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해요. 우선 당장은 동네 이웃주민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얼마 전 집 공사를 하며 소음을 많이 낸데 대한 미안함을 차라도 대접하며 대신할까해요. 33년 전에 저를 처음 '싱글벙글쇼'에 캐스팅해주신 김건영 선생님(MBC 전 라디오국 PD)도 찾아뵙고 식사를 함께 하려고요. 그러고도 차근차근 고마움을 표시해할 분들이 수두룩하죠.

김혜영은 자신의 이런 계획과는 별개로 "다시 바빠질 것같다"고 했다. 그는 곧 방송을 앞둔 JTBC 신설 예능프로그램에서 아나운서 김현욱과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10년째 출연중인 KBS1 '아침마당'(매주 수요일)과 TV조선 스타 인생다큐 '마이웨이'(월요일) 내레이션 등 기존 프로그램에서의 활약도 기대치를 키우고 있다. 그는 "사람은 살면서 그냥 나이만 먹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적응하는 것 같다"면서 "저를 힘들게 했던 이별과 헤어짐은 이제 또다른 만남과 시작을 알리는 계기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바빠질 것같아요. 김혜영은 곧 방송을 앞둔 JTBC 신설 예능프로그램에서 아나운서 김현욱(왼쪽)과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사진 위는 싱글벙글쇼 당시 강석. /이덕인 기자, JTBC

김혜영은 인터뷰 내내 '싱글벙글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제 (싱글벙글쇼) 그만 얘기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자"고 말한 뒤에도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가 얼마나 깊게 뜨겁게 자신의 분신처럼 라디오에 애정을 쏟았는지 짐작이 갔다.

"한 달이 조금 지났는데 다른 분들이 진행하는 '싱글벙글쇼'를 아직 한번도 들어보지를 못했어요. 용기가 나질 않아요. 듣는 순간 정말 이별을 선언해야할 것 같아 두려워요.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겉으론 쿨한 듯 담담한 척 해도 제 마음속에선 영원히 변치않을 애인 같은 '싱글벙글쇼'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거죠."

그는 골든마우스(MBC 라디오에서 20년 이상 프로그램을 진행한 DJ에게 수여하는 상)를 받는 순간 모든 욕심을 내려놨다. 매년 개편 때마다 마음을 비우고, 웃으며 떠나는 연습을 했다. 그는 "그런데 무려 13년간이나 덤으로 마이크를 더 잡으면서 뗄 수 없을 만큼 깊은 정이 든 것 같다"고 했다.

김혜영은 일상적인 인터뷰 형식을 벗어나 가볍게 차 한잔 하는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서로 마주보는 대신 쇼파에 나란히 앉고보니 오히려 얼굴을 가까이 맞댄 친근함이 더해졌다. 인터뷰 말미에 필자가 "25살에 잡은 마이크를 58살에 놓게 됐네요"라고 하니 금방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울다 웃으며 보낸 2시간여, 그에게선 여전히 해맑은 소녀 감성이 뚝뚝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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