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의 세계②] 뮤지션들의 파편, 직소 퍼즐의 '묘미'

매드클라운(왼쪽)이 분홍색 복면을 쓰고 마미손으로 활동하며 가요계에는 부캐의 세계가 열렸다. 사실 뮤지션의 자아 나누기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지만 이 장치로 이렇게 뜨거운 인기를 누린 것은 그가 최초였다. /더팩트DB, 세임사이드 컴퍼니 제공

최근 방송가 핵심 키워드는 '캐릭터'다. 관찰 예능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넘쳐나면서 방송인들은 고유의 캐릭터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캐릭터를 만들어 신선함과 재미를 더한다. 유산슬로 대표되는 유재석과 김신영, 추대엽, 박나래도 부캐릭터 대열에 합류했다. 가요계는 이들보다 앞서 폭넓은 활동을 위해 정체성을 분리한 부캐릭터를 꾸준히 사용해왔다. '부캐 놀이'는 연예계 전반에 번지며 방송가를 장악하고 있다. <편집자 주>

마미손이 시작한 '유쾌한 변주'

[더팩트 | 유지훈 기자] 1997년 미국의 한 언더그라운드 래퍼는 '슬림 셰이디(Slim Shady)'라는 자아를 만들었고 이 이름을 그대로 따온 EP를 발매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닥터드레는 가능성을 봤고 슬림 셰이디를 만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그렇게 완성된 'The Slim Shady LP'라는 정규앨범은 그래미 상에서 최우수 랩 앨범을 수상했다. 우리가 '랩의 신'이라고 부르는 에미넴(Eminem)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슬림 셰이디는 에미넴의 '부캐'이자 '광인'이다.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유명인들을 디스하고 여성을 혐오하며 동성애자들을 힐난한다. 심지어 전 부인과 자신의 어머니에게까지도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문제적인 행동으로 인지도를 쌓은 그는 예전으로 돌아가 진지한 노래를 선보이며 슬림 셰이디와 자신을 분리시켰다. 연출된 자아와 본연의 자아를 오가는 완벽한 '부캐' 놀이였다.

에미넴은 Just Lose It 뮤직비디오에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사람을 등장시켰다. 마이클잭슨은 춤을 추던 도중 불에 휩싸여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에미넴은 그를 보고 구토한다. 과거 마이클 잭슨은 음료 광고를 찍다가 화상을 입어 백반증 증세가 심해졌고 이 때문에 성형 중독이라는 루머에 시달린 바 있다. /Just Lose It 뮤직비디오 캡처

최근의 한국 연예계는 '부캐' 놀이에 한창이다.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 유산슬, 치킨집을 운영하는 닭터유, 드러머 유고스타, 하피스타 유르페우스 등의 다양한 자아를 만들면서다. 김신영은 트로트 가수 김다비라는 새로운 인격을 만들었고 각종 예능에 출연해 이모 콘셉트로 특유의 구수한 말투를 뱉어 웃음을 안긴다.

가요계의 '부캐' 놀이는 이러한 예능의 변주와 비슷한 형태로 주목 받았다. Mnet 예능프로그램 '쇼미더머니 777'에서 핑크색 복면을 쓴 채 등장한 마미손이라는 참가자는 위트 넘치는 가사로 화제를 모았다. 사람들은 마미손의 정체를 매드클라운이라고 추측했다. 랩 스타일과 톤이 흡사했지만 매드클라운은 자신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당시 '부캐' 놀이에 친숙하지 않았던 몇몇은 '매드클라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이라며 혼동하기도 했다.

이어 발매된 마미손의 '소년점프'는 뜨거운 인기를 얻었고 유튜브 조회수 4150만회(6월 5일 기준)를 기록했다. 이후 마미손은 각종 음악프로그램을 종횡무진했으며 수많은 화보촬영과 광고 모델로도 발탁됐다. '2018 MAMA'에 올라 무대를 꾸미는 영광도 누렸다. 강렬한 랩핑과 진중한 가사로 입지를 다졌던 매드클라운이지만 그 정체성이 활동반경에 있어 발목을 잡았을 터다. 그가 마미손의 유쾌한 이미지를 입은 것은 '소년점프'의 가사처럼 모두 "계획대로" 진행된 일이었다.

구준엽과 돈스파이크 용준형 준케이 슈가는 모두 기존 영역에서 활동반경을 넓히며 새로운 이름을 찾았다. /뉴시스, 더팩트 DB,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실 뮤지션들의 '부캐' 만들기는 오래 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클론 구준엽은 DJ로서 활동할 때 디제이 쿠(DJ KOO)라는 이름을 쓰며 댄스가수로서의 정체성과 분리시켰다. 돈스파이크는 댄스 힙합 음악을 할 때는 이 활동명을, 발라드곡을 쓸 때는 본명 김민수를 크레딧에 올린다. 아이돌들은 퍼포먼서가 아닌 뮤지션으로서 작업물을 낼 때 다른 이름을 내세운다. 용준형은 조커, 2PM 준수는 준케이 등이 그랬다. 방탄소년단 슈가는 믹스테잎을 발매할 때면 agustD(어거스트 디)라는 아티스트가 된다.

한 가요 관계자는 <더팩트>에 "자아 분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쓰여온 뮤지션들의 활동 방식이다. 마미손의 성공과 유재석의 활약으로 대중에게 완벽하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눕독은 레게 음반을 낼 때는 스눕 라이언이라는 이름을 쓴다. 기존의 색을 버리고 새로운 장르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기존 자아를 분리시키는 것은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최근 가요계의 자아 분리 사례는 타이거JK다.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던 그는 드렁큰타이거로서 은퇴를 선언했고 앞으로는 타이거JK로서만 활동한다. 이와 함께 시작한 '필 굿 쨈스' 프로젝트는 그동안 타이거JK를 덮고 있던 힙합이라는 장르를 한 꺼풀씩 벗겨낸다. 이 프로젝트는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을 목표로 한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최근 발표한 '심의에 걸리는 사랑노래' 속 타이거JK는 래퍼가 아닌 소울 싱어다.

타이거JK는 오랫동안 함께해왔던 드렁큰타이거라는 이름과 작별했다. 대신 힙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더팩트DB

뮤지션의 '부캐' 만들기가 늘 유효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에미넴은 슬림 셰이디로서 문제의 소지가 많은 가사의 노래를 낼 때마다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대중과 평단의 비난을 받아왔다. 스스로는 자아를 분리시켰을 지라도 발화의 주체는 여전히 에미넴이다. '페미니스트'라는 노래를 발표해 뭇매를 받았던 산이도 비슷했다. 여성 혐오 가사라는 논란에 휩싸인 그는 "노래에 등장하는 화자는 내가 아니"라며 "메타적 소설과 영화를 좋아해 이런 장치를 심어놨다"고 설명했지만 대중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뮤지션의 '부캐' 활동은 한 조각씩 찾아내 원래 자리에 끼워 넣는 직소 퍼즐과 같다. 완성될 그림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즐거운 과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뿐이고 때론 불편함을 동반한다. 누군가는 제 2의 마미손을, 누군가는 제 2의 에미넴을 꿈꾸는 기상천외한 '부캐의 세계'가 열린 2020년의 가요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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