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마이크 내려놓은 대신 고희 나이에 '가수-연기자로 재도약'
[더팩트|강일홍 기자] 방송인 허참(70·본명 이상룡)은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 MC의 원조다. 그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첫방부터 종영까지 26년간 진행했다. 그가 21명의 여성 MC를 바꿔가며 진행한 KBS '가족오락관'(1984년 4월~2009년 4월, 1237회로 종영)은 지금도 국내 예능프로그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부터 예능인의 끼가 충만했다. 1970년 상경해 '쉘부르'라는 음악 다방 MC로 활동하면서 젊은 연인들 사이에 존재감을 알렸다. 이듬해 MBC라디오 '박원홍의 청춘은 즐거워'를 통해 방송에 입문한다. 당시 대학 캠퍼스와 군 위문 공개방송 프로그램인 '젊음은 가득히'를 거쳐 TBC 동양방송의 '7대 가수쇼' MC로 발탁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그의 감칠맛 나는 진행은 이후 TBC '쇼쇼쇼', KBS '도전 주부가요스타' '지구촌 노래자랑', SBS '빙글빙글 퀴즈' 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의 인생프로그램은 역시 '가족오락관'이다. 한때 35% 전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누렸고, 90년대 후반에는 KBS '9시 뉴스'와 맞물리는 시간대에 편성됐음에도 15~17%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정겹고 푸근한 이미지를 가진 그는 시청자들에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 MC'로 각인돼 있다. 이런 열정은 고희를 넘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허참이 이번에는 연기자로, 가수로 또 한번 도전에 나섰다. 최근 '아내는 지금'이란 곡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 그를 직접 만났다. 스페셜 인터뷰는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고희를 넘어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유명 방송인의 힘인가? 한달 만에 빠르게 반응을 내고 있다. 데뷔곡 '아내는 지금'은 어떤 곡인가?
요즘 저 자신도 놀라고 있어요. 방송에 몇차례 소개된 뒤 이젠 아예 가수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뜨거운 호응이 생겨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해봤어요. 중장년 부부들의 삶과 세태를 반영한 노래인데 현 시대를 살고있는 대한민국 가장이라면 가사만 들어봐도 와닿는 게 있어요. 김수희 씨의 '멍에', 오승근 씨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제작한 박웅 씨가 군 시절(26사단 문선대) 제 선임이에요. 각자 다른 분야에 몰두하다 보니 서로 접점이 없었는데 이번 '아내는 지금'을 통해 인생 후반전 제대로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노래를 불러 보니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닌 바로 제 모습이더라고요.
허참은 "50년 가까이 방송인으로 살면서 어떤 한 가지 일에 이렇게 깊이 몰두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정원수 작곡의 '아내는 지금'을 처음 받고 나서 수 천 번을 부르고 또 불렀다. 말 그대로 피나는 연습을 했다. 허참은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잠깐 깼는데,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더라"면서 "심지어 어떤 날은 꿈속에서도 악보를 체크하고 노래하는 제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음반을 처음 낸 건 아니라고 들었다. 방송인으로서도 은퇴할 나이에 가수 꿈을 키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자천타천 주변의 권유로 몇 차례 음반을 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뭐든 절박하지 않으면 전력을 다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역시 미미한 것 같아요. 음악에 대한 미련은 늘 갖고 있었지만 MC로, DJ로 잘 나가던 시절엔 절실하게 매달리지 않았어요. 가수로 활동할 틈도 없었을 뿐더러, 별도의 비용을 들여 매니저를 기용하고 PR한다는 게 엄두가 안 났으니까요. 사실 방송인으로 워낙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서 이젠 전원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은 소망이 있었어요. 막상 모든 걸 내려놓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제 안에 숨어있던 음악적 욕구가 샘솟은 게 아닌가 싶어요.
신곡 '아내는 지금'은 허참의 4번째 음반이다. 허참은 라디오 DJ로 인기 절정을 달리던 70년대 중반 '왜 몰라주나'(유심초)로 첫 음반을 냈다. 그는 "당시 제 인기를 등에 업고 급조해 만든 노래였는데 PD가 선곡을 해도 제가 낯뜨거워서 틀지 않았다"면서 "연습이나 녹음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데다 음반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 히트할 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노래는 결국 유심초가 다시 불렀다. 10년 뒤 '가족오락관' 진행자 시절 방송 진행자들끼리 옴니버스(KBS 라디오국 제작)을 냈다. 당시 '이별은 아니지요'를 발표했다. 다시 10년 뒤인 2007년 설운도 작사 작곡의 '추억의 여자'를 발표하기도 했다.
-26년간 진행한 '가족오락관'은 방송사에 기록될 만큼 가족예능의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다. 워낙 애정이 깊었던 만큼 마이크를 내려놓은 뒤 좀 힘들었을 것 같다.
강 기자님이 당시 제 심정을 족집게처럼 딱 짚어내시네요. 맞아요, 한동안은 정말 힘들었죠. '가족오락관'은 사실 제 분신과도 같은 프로그램이었어요. 말이 그렇지, 26년 동안 매주 한 차례씩 시청자들과 만나던 프로그램이잖아요. 종영되고 나서 상실감에 한동안 멍하더군요. 겉으론 대범한 척 해도 속으론 울었어요. 고통스러웠죠. 아마도 20년을 넘게 하다보니 생각이 무뎌졌겠지만, 저는 제가 그만 두지 않으면 평생할 줄 알았어요. 세상에 영원한 게 없고, 더구나 방송프로그램은 길어야 2~3년이면 바뀐다는 걸 망각하고 산 거죠.
허참이란 이름 앞에는 늘 '가족오락관'이 붙어다녔다. 그만큼 오래 진행을 맡았기 때문이다. 1984년 4월 3일부터 2000년 10월5일까지는 KBS 2TV에서 방송됐고, 2000년 10월14일부터 2009년 4월18일까지 KBS 1TV로 채널을 이관해 방영됐다. 드라마 또는 경쟁사 프로그램과 시청률 경쟁을 하며 시간대와 방영일을 몇 차례 바꾸기도 했다. 허참은 첫회부터 최종회까지 고정으로 진행했고, 함께한 역대 여성 진행자는 오유경 정소녀 장혜영 김자영 김경희 최영미 김혜영 전혜진 이유리 장서희 오현정 오영실 손미나 변우영 윤지영 박주아 박사임 이정민 김새롬 김보민 이선영 등 무려 21명에 이른다.
-가수활동에 이어 드라마에도 출연 중인데 71년 TBC 시절 이후 50년 가까이 국민 MC로 활약하면서 연기는 처음 아닌가.
저는 MC 마이크를 놓으면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게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직접 경험하고 겪어보니 열정과 관심만 있으면 나이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하고 있잖아요. 음반을 준비하고 발표하느라 한창 바쁜 와중에 드라마 출연제의가 들어왔어요. 처음엔 대사가 많지 않은 카메오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합류했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간단한 대사 한 마디도 상대와 호흡이 맞아야해서 어렵더라고요. 대본을 남의 대사까지 통째로 외워야만 겨우 장단을 맞출 수가 있더라고요. 다행히 극중 삼각관계인 임채무 씨가 많이 가르쳐주고 배려해줘서 빨리 적응을 했어요. 이래서 뭐든 초보는 서러운 모양이에요.
허참은 SBS 아침드라마 '맛 좀 보실래요' 허의료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이 드라마엔 카메오 연기가 아닌 정식 배우로 참여했다. 그는 "과거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씨 등이 드라마에 나오면 '뭐 대사 몇 마디 하면서 왜 저렇게 어설프고 우스워'라고 생각했다"면서 "막상 정색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서보니 맘 같이 되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아무리 짧은 대사라도 밤새도록 반복 연습을 해야 다른 배우들한테 창피 안 당하고 겨우 따라갈 정도"라면서 "다만 힘들면서도 빠져드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흑백 TV 시절인 70년대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많은 스케줄을 한꺼번에 소화하느라 탈진해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스타는 치솟는 인기 만큼 몸이 고달픕니다. 연예계가 워낙 부익부 빈익빈이 심한 곳이잖아요. 적당히 안배가 되면 참 좋을 텐데 인기 있는 사람만 자꾸 찾게 돼 있거든요. 음악다방에서 DJ 하다 방송에 입문한 저로서는 방송이 가져다준 인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2시간 간격으로 매일 인기 라디오프로그램 생방을 하고나면 녹초가 됩니다. 스케줄은 항상 밤 11시경에 무교동에서 끝났는데 대개는 술자리로 이어졌습니다. 새벽까지 마시고, 잠깐 쉬고 나면 아침에 다시 방송을 할 수밖에 없는 강행군이었어요. 탈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70년대는 TV보다 라디오가 대세 매체로 인기를 누렸다. 허참은 매일 4~5개 프로그램에 동시 출연할 만큼 특급 스타였다. 그는 MBC 라디오 '싱글벙글쇼' '푸른신호등', 동아방송 '허참과 이 밤을', 기독교방송 '연못골 미스터 허' 등에 겹치기 출연했다. 바쁜 와중에 주말에는 TV 군위문프로그램 MC도 맡았다. 그는 "그야말로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빴다"면서 "당시엔 가장 비중있는 쇼프로그램은 대부분 저한테 할당되는 바람에 끝내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신세(을지병원 입원)를 졌다"고 말했다.
-72년 미스롯데로 발탁된 서미경 씨와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방송 MC를 하면서 가장 기억나는 파트너는 누구인가?
상대가 너무 많아서 누구 한 명 꼽기가 쉽지 않네요. '가족오락관'에서만 21명의 여성 MC를 만났으니 일일이 다 기억이 나지도 않고요. 그래도 그중 한명을 꼽으라면 역시 정소녀 씨입니다. 정소녀씨는 TBC 시절 인기쇼프로그램인 '쇼쇼쇼'에서도 호흡을 맞췄고, '가족오락관' 21명의 파트너 중 가장 오래 했던 것 같아요. 요즘에도 방송이나 행사장 같은데서 종종 만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요. 미스롯데 출신인 서미경 씨는 TBC '데이트쇼'를 함께 진행했죠. 당시엔 미스롯데로 연예계에 갓 입문한 신인이었어요. 워낙 출중한 외모와 신선한 분위기를 내뿜어 제작진이 방송사 차원에서 적극 나서 저와 묶어줬던 걸로 기억해요.
-방송 통폐합을 하면서 마지막 고별프로그램인 '아듀 TBC'를 진행하고, KBS에 합류한 뒤엔 '축하 노래'를 불렀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국방송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소회가 궁금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방송 통폐합 또는 언론 통폐합이라는 불행한 역사현장을 아무 저항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지금 여의도 KBS 별관(동관) 스튜디오가 당시엔 JTBC였어요. 이곳에서 통폐합 결정후 마지막 고별쇼를 했는데, 방송관계자를 포함한 수많은 분들이 눈물을 머금었죠. 저는 MC여서 차마 눈물까진 흘리지 않았는데 가수 이은하는 그날 하도 많이 울어 밉보였는지 한동안 방송출연이 금지됐다고 들었어요. KBS로 합류한 뒤에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한 통폐합 축하쇼에 출연해 축하노래까지 불렀으니 그게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죠.
허참은 "아무리 대중적 인기가 있어도, 도도히 흘러가는 물결을 거스르고 저항하긴 어려웠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여의도 별관에서 동아방송과 TBC 방송 직원들이 줄을 서 본관(서관)으로 걸어가는 장면은 지금도 마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듯한 모습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통폐합 직후 스튜디오서 진행하는 KBS '라디오 동서남북'과 공개방송 '한낮의 공개쇼' 등의 DJ와 MC로 발탁됐다. 이후 84년 '가족오락관' 마이크를 잡으면서 컬러TV시대 최고 예능 MC로 자리매김했다.
허참은 경기 남양주에 집을 지어 36년째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MC로 바쁘게 활동하던 시절에도 틈만 나면 텃밭을 일구고 닭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방송 마이크를 내려놓은 뒤에는 이곳에 아예 '참스팜스'라는 농장을 만들어 망중한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다.
반세기 가까이 국민 MC로 명성을 날린 그도 집안에서는 1남2녀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4년간 아들을 도와 이곳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허참은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면서 "인생 후반전을 욕심 안 내고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공무원 하던 아들이 어느날 레스토랑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떼를 써 모른 척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음반을 낸 허참은 밀려드는 출연 섭외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동안 뜸했던 방송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그는 "매주 고정 출연할 때는 몰랐는데 여기저기 게스트로 한번씩 초대를 받는 프로그램이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고 말했다. KBS1 '아침마당'(13일 방송)에 이어 '노래가 좋다'(21일 방송) 등에 연달아 출연해 신곡 '아내는 지금'을 소개한다.
3전4기, 그는 네번째 음반을 내고서야 정식 가수로 명함을 내밀었다. 서울 종로 헐리우드극장 등에서 연말연시 '허참 신곡발표회'를 갖는 그는 "납골세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노래여서 보람이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얼마 전 대한가수협회에 정식 가수로 등록했다"면서 "이제는 MC가 아닌 가수 허참으로 불러달라"며 특유의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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