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 연예계는 스타도 많고, 연예 매체도 많다. 모처럼 연예인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하는 경우도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대부분의 내용이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도 소속사에서 미리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스타를 '내가 본 OOO' 포맷에 담아 사실 그대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정재형, 피아노·자연과 함께 한 'Avec Paino'
[더팩트|김희주 기자] 필모그래피만 본다면,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명문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한양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한 후 훌쩍 파리로 떠나 해외 유학을 선언하고 다수 영화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약한 이력이 있는 정재형은, 평범한 인생을 사는 어떤 일반인에게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엘리트 뮤지션'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한 예술가로서 탄탄대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은 정재형에 대한 선입견으로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정재형이 내놓을 음악과 예술적 용어로 가득 찰 답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청나게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머릿속을 채웠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안테나뮤직 사옥에서 정재형의 새 앨범 'Avec Piano'(아베크 피아노) 발매 기념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도착하자마자 관계자로부터 받은 프레스 키트(Press kit)에는 그의 새 앨범 수록곡들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었다. 타이틀곡 'La Mer'(라 메르)을 비롯한 'Mistral'(미스트랄) 'Andante'(안단테) 'Le Mont'(르 몽) 등 사전 없이는 뜻을 짐작하기 힘든 단어들로 이루어진 수록곡 이름들을 보며 당황하던 때, 정재형이 인터뷰실로 등장했다.
'Avec Piano'는 지난 2010년 발매돼 호평을 받은 피아노 연주곡 앨범 'Le Petit Piano'(르 쁘띠 피아노) 이후 발표하는 또 한 번의 연주곡 앨범으로 피아노와 '함께' 유려한 조화를 이룬 퀄텟, 오케스트라, 첼로, 바이올린, 비올라 등 다양한 악기들과 만남을 담았다.
무려 9년 만의 컴백.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낸 결과물이기에 기쁨과 설렘을 느낄 법도 한데, 정재형은 가장 먼저 앨범 발매 소감으로 "공허함이 느껴진다. 애증의 작업물이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었다. 그래서 진전이 없다고 느껴졌던 최근에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인적이 드문 일본의 한 산골짜기에서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작업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의외로 정재형은 이날 음악에 대한 어려움을 많이 토로했다. 그는 "제 경우에는 불현듯 지나가는 영감이나 직감에 의존하며 작업할 때는 지났다. 음악은 저에게 감이 아닌 '연습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제가 하는 말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시간'이라고 일컫는데, 한자리에 앉아서 몰두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그 시간들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행복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고통'. 직업이 작곡가이니만큼 타고난 감과 천재성으로 노래 한 곡 만들어내는 것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 정재형은 이렇게 음악을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영감이 아닌 홀로 가지는 시간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그는 요즘 자연으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얻고 이를 음악으로 풀어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에서 혼자 있을 때는 주로 서핑을 했는데, 나 자신이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지더라. 자연의 그 원대함과 경이로움으로부터 느낀 원초적 감정들을 이번 앨범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타이틀 곡 'La Mer'는 제목처럼 바다를 품고 있듯이 잔잔하다가도 맹렬하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극적인 전개를 지닌 곡이다. 대자연의 광활한 바다에서 파도의 한 조각까지 훑어 내려가며 구석구석 가슴 아픈 일들을 치유하듯 어루만지는 선율이 인상적이다.
피아노 연주곡으로 채워진 이번 앨범을 설명하며, 정재형은 작곡가가 아닌 피아노 연주가로서 고충도 토로했다. 그는 "악기를 다루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친한 악기 연주자들과 만나서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악기 연주를 하는 거 말인데, 정말 힘들지 않아?'라고. 악기는 끝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조금의 공백도 있으면 안 된다. 꾸준히,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 몸을 써서 그 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항상 자유로운 인생을 사시는 것 같다"는 취재진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정재형은 "남들이 볼 때는 속 편해 보일 테다. 파리 유학도 다녀오고 작업이 안 풀린다고 일본으로 떠나고 어떨 때는 음악 감독도 도전하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물 밑으로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파리 유학을 할 때는 여름 휴가를 거의 가본 적이 없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음악 감독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고 다시 파리로 가 학업을 이어갔다. 무대에 서기 전에는 엄청난 연습량을 거쳐 나 자신의 확신을 얻는다.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가면 그 4~5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는 소신을 내비쳤다.
이렇게 낙천적 뮤지션이라는 정재형을 향한 선입견이 끝없는 노력으로 결과를 만드는 완벽주의자라는 깨달음으로 바뀔 때쯤, 인터뷰 시간은 끝을 향해 달렸다. 정재형은 마지막까지도 음악에 관한 끝없는 고민과 고충 가득한 말을 남기며 몸소 자신의 음악적 가치관을 밝혔다.
"저는 뮤지션으로서 책임감이 있어요. 아주 무섭고 잔인한 그런... 나만의 음악을, '내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싶은 방향성에서 나오는 의무감이에요. 한 번쯤 쉽게 쉽게 갈 수도 있지 않냐고요? 전혀요. 앞으로도 저는 이렇게 예민하면서도 꾸준한 자극으로 제 세계를 이어나가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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