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 전원생활로 '여유'...22년 만의 언론 인터뷰
[더팩트|마석(남양주시)=강일홍 기자] 배우 강문영(53, 본명 강유진)은 여고 재학 중 CF모델로 발탁되며 단번에 신데렐라의 꿈을 이뤘다. 영화 '스물 하나의 비망록'(83년)에서 연기한 의대생 청조 역은 지금도 팬들 사이에 상큼 발랄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28년 뒤 수지가 연기한 영화 '건축학개론'(2011년)의 풋풋한 여대생 서연과 비교되는 '원조 첫사랑'의 상징이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최고 스타로 부상한 이후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그야말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았다. 가수 이승철을 포함해 두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화제를 뿌렸고, 절정의 인기를 누린 여배우답게 종종 '역대급 루머'에 시달렸다.
강문영은 지난 2월 MBC 수목드라마 '봄이 오나 봄'에 출연(세라 강)하며 오랜만에 연기자로 돌아왔다. 드라마는 2015년 '화정' 이후 4년 만이다. 어느덧 중년의 깊이와 중후함을 내뿜으며 주목을 끌었다. 3년째 출연중인 SBS 예능 '불타는 청춘'에서도 이전에 볼 수 없던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시청자들과 교감하고 있다.
대면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그는 "툭 하면 따라붙는 악성 댓글이 딸에게 영향을 줄까봐 두렵다"면서 "언론과의 정식 인터뷰는 22년만"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그의 전성기 시절인 90년대 중반 이후 처음이다. 강문영의 36년 배우 인생과 삶을 들여다봤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5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산자락에 위치한 강문영 자택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집이 그야말로 휴양지 같은 느낌이다. 주변에 온통 꽃이 만발해 더 여유로운 전원 분위기가 난다. 이곳에 정착한 지 오래됐나.
이사온 지는 3년 반쯤 됐어요. 딸 아이 학교(사립 S초등학교)와 가까운 곳을 찾다가 지인한테 소개를 받고 첫눈에 반한 집이에요. 사시사철 새소리가 들리는 공기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인데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뷰가 정말 아름다워요. 비가 내린 다음 날은 집 주변으로 운무가 깔리며 마치 구름 속에 떠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어요. 서울 강남과는 불과 30분 거리여서 도심과 동떨어져 있다는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않아요.
인터뷰를 위해 내비게이션 주소를 찍고 찾아간 그의 집은 정원에 야외수영장을 갖춘 대지 300여평 2층 저택이었다. 멀리 마석 중심가를 살짝 빗겨 내려다보는 산자락 아래 아담하게 자리했다. 주택 옆엔 그가 직접 가꾸는 텃밭이 있고, 각종 초록 채소가 오밀조밀 자라고 있는 전원 풍경이 한가로웠다. 강문영은 "강남의 30평대 아파트 값으로 이만한 여유를 만끽하고 산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TV에 비치는 모습과 달리 매우 유쾌하고 활달해 보인다. 집에서 인터뷰를 하는 게 편안해서인가.
인터뷰를 위해 제 집에 방문하신 분은 강 기자님이 처음이에요. 사실 첫 결혼이 파경으로 끝난 97년 이후 언론과 정식으로 인터뷰 한 적이 없거든요. 제가 실제로 한 말과 기사로 나오는 내용에 차이가 많고, 반복적으로 살이 붙어 힘들게 한 적이 많았어요. 그 사이 저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그래서 더 이런 저런 이유를 핑계로 언론을 피할 수밖에 없었죠. 오늘 모처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다보니 옛날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듯 한결 마음이 편한해졌어요.
그가 살아온 이력 때문일까. 필자 역시 강문영은 뭔가 도도하고 까탈스러울 것이란 선입견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예상밖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다만 밝고 환한 표정과 달리 얼굴이 다소 수척해 보여 이유를 물으니 그는 "어제 아침부터 심한 독감에 걸려 병원신세를 졌다"면서 "기자님도 기온 차가 심한 요즘 특히 건강에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중년팬들은 여전히 '전성기 시절 강문영'을 기억하고 있다. 배우로서 걸어온 삶이 순탄치는 않았다.
절친인 황신혜 언니나 강수연 씨처럼 저 역시 다작을 하는 배우가 아니었어요. 당시 치열하게 경쟁하는 배우가 많지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저는 운 좋게도 늘 유명 기업 CF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주목을 받았죠. 그런데 조명을 많이 받은 만큼 고난과 역경은 더 힘들더군요. 제 인생은 결국 제가 선택한 것이니 누굴 탓할 수는 없는 일이죠. 굴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터득한 깨달음은 있어요. '잘나가는 인기 배우가 아닌 좋은 배우'로 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람이 없어요.
그는 여고시절 명동의 유명 의상실 주인이 추천한 잡지화보와 표지모델을 하며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얄개시리즈 영화 '대학들개'와 '스물 하나의 비망록' '모두 다 사랑하리' 등 3편에 출연했다. '쇼 2000' 2대 MC(김청 후임)로 발탁돼 이덕화와 진행했고, 파리 유학을 다녀온 뒤엔 '아름다운 밀회' '끝없는 사랑' '꼬치미' '야망의 세월' 등에서 활약하며 '롯데가나' '금강제화' '농심' '피어리스'(화장품) '마르조'(의류) 등 당시 인기 CF를 독식했다.
-여배우란 이름으로 살면서 온갖 악성루머에 시달리지 않았나. 자신을 힘들게 한 대표적인 루머는 무엇인가.
20여년 전에 느닷없이 전직 대통령 아들과 모종의 관계라는 소문이 퍼졌어요. 사실 역술가인 아버지(백운산)가 정계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있다보니 우연히 그분과도 공식적인 장소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죠. 그후 소문이 기사로 나오기도 했는데 워낙 황당한 내용이라 저와 가족들은 그냥 웃고 말았어요. 유명세를 치른다고 생각해 맞대응도 하지 않았죠.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 줄 알았는데 갈수록 악소문으로 살이 붙어 증폭되더라고요.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바로 대응하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스러워요.
강문영은 이외에도 룸살롱 마담설, 유명 교회 후계자와의 교제 등 역대급 소문에 시달렸다.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그는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실체없는 악소문의 근거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면서 "최근 소속사 JB인터내셔널 측과 협의한 뒤 법률대리인을 통해 블로그 등에 인용된 악성 글에 법적 책임을 묻기로 했다"고 밝혔다.
-요즘도 네티즌 악플을 단골로 달고 산다고 들었다. 정도가 심한 댓글을 보면 평상심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텐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이런 상황은 너무 힘들어요. 방송이나 신문에서 제 얘기가 한줄만 거론돼도 그냥 악플이 달려요. 예전에는 그냥 무시하고 참을 만했는데 딸이 저와 친구처럼 대화가 되는 지금은 그 자체만으로 고통이에요. 정도가 지나치거든요. 배우로 살면서 제 의지와 무관하게 곡절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강문영은 사업을 하는 어머니의 넉넉한 경제력 덕분에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다. 배우로 데뷔한 이후에도 소신껏 모든 걸 누리고 살았다. 가난의 설움을 견디고 일약 신데렐라가 되는 소녀가장들이 많은 연예계에선 드문 케이스다. 이에 대해 강문영은 "주목을 받는 배우는 사생활조차 모범이 되는 게 정답이지만 저의 경우는 유독 시샘을 많이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사실과 다른 여러 부정적 소문이 덧씌워져 자신을 더 옭아맸다고 말했다.
-데뷔 시절 청순발랄한 이미지와 함께 '파격 노출 연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된 적도 있지 않나.
1992년 고 강정수 감독의 '우리 사랑 이대로'란 작품이었어요. 최민식 선배와 파리 올로케로 찍은 몽환적인 느낌의 영화였죠. 1980년대 충무로 흥행법칙 중 하나가 노출이었어요.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 '나인 하프 위크'(86년, 킴 베이싱어 주연)처럼 찍는다고 해 결심을 했는데 노출 장면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대신 저는 계약서 쓸 때 노출 수위를 정해놓은 상태라 베드신은 모두 대역을 썼어요. 그래서 노출 연기 부분은 처음부터 불필요한 논란거리였죠.
'우리 사랑 이대로'에서 강문영은 신우역을, 최민식이 준혁 역을 연기했다. 정낙희 설도윤 등이 함께 출연했다. 강문영은 "당시는 에로틱 영화가 대체로 트렌드였던 시기였다"면서 "대신 배우가 싫어할 경우는 대역을 써 편집을 했는데 몸매가 달라 어색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예나 지금이나 저는 글래머가 아니어서 노출연기를 피하고 싶었다"고 웃었다.
-지난해 첫 연극 무대에 섰다고 들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작년 9월부터 연말까지 명보아트홀에서 가진 '쥐덫'이란 작품이에요. 저는 영화나 정극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는 희열을 만끽했어요. 정말 너무 만족스러웠고, 왜 이제서야 했나 싶을 정도로 데뷔 35년 만에 처음 오른 연극무대에 푹 빠져든 계기가 됐어요. 연극과 뮤지컬은 과거에도 수없이 제의가 왔는데 엄두를 못냈거요. 관객 앞에서 그렇게 에너제틱한 열정을 쏟아낼 줄은 저 스스로도 몰랐어요. 앞으론 기회만 생기면 연극무대에 자주 설 것같아요.
강문영은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쥐덫'에서 매사에 까칠한 보일 역(役)을 맡았다. 양희경 김성경이 트리플 캐스팅돼 연기했고, 트로터 역에는 박형준 홍경민 이호준이 호흡을 맞췄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범죄 이야기 속에 밀도 있는 서스펜스와 예상을 뒤엎는 반전은 물론 관객들로부터 독특한 구성과 추리 기법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들었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 희로애락은 쉽게 감출 수 없다고 한다. 표정만으로 굉장히 평화로워보인다.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
저는 돌고 돌아 이제서야 완벽한 안정을 찾았어요. 딸과 이곳에 정착한 이후 더없이 행복해요. 돈도 명예도 인기도,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아요. 운동은 특별히 할 필요도 없어요. 텃밭을 가꾸거나 정원을 꾸미고, 다섯마리 강아지들과 어울리다 보면 쉴 틈이 없거든요. 집 주변이 산이어서 수시로 산책하는 것도 낙이고, 가끔은 지인들과 가까운 필드에서 골프 라운드를 즐기는 여유로움은 덤이에요.
"제 딸이 좀 더 성장해 엄마를 이해할 때쯤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여배우란 굴레나 불편함을 억지로 벗어나기보다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부딪쳐 양보하고 배려하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표현만큼은 여전히 솔직하고 직설화법이다.
강문영의 어릴 적 꿈은 '현모양처'다. 연예계 진출이나 스타가 되고 싶었던게 아니라 아들만 셋 낳아 평범하게 잘 키우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보통 사람들한테는 소박한 꿈일 수 있지만 저한테는 끝내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면서 "비록 두 차례 결혼에 실패한 아픔은 있었지만 이를 충분히 상쇄하고 남을 예쁜 딸(예주)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이혼은 어쩔 수 없었던 같아요. 서로의 인연이 거기까지인 걸 어떡하겠어요. 운명이 그러니 결국 각자의 길을 걷는 거죠. 한때는 힘들고 아팠던 기억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추억들도 많더라고요."
시간이 약이 된 것일까. 황금 같은 젊은 시절,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한 강문영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깊어지고 원숙해졌다. 그는 닫았던 마음을 열었다. 오랜만에 속내를 털어놓는 인터뷰를 하며 연신 호방하게 웃었다. 두 시간 남짓 우아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건강한 매력을 내뿜었다. 20여년 만에 인터뷰이로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반짝이는 '엔돌핀 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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