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첫 음반 내고 외길 고수...'싱글'이지만 외로울 틈 없어
[더팩트|강일홍 기자] 남궁옥분(60)은 만년 소녀 같은 청량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그에게만 시간이 멈춘 듯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지금도 여전히 '통기타 디바' '대한민국 포크송 가수'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눈빛은 늘 아름답고 빛이 난다.
그는 애초 성악가를 꿈꿨을 만큼 꾀꼬리 목소리로 타고났다. 노래와 인연은 여고시절인 70년대 중반 친구 손에 이끌려 찾았던 포크 음악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 운명적 길을 열었다. 이후 우연히 참가한 서울 명동 한복판 '쉘부르 콘테스트'에서의 우승이 '이종환 사단'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으로 이끌게 된다.
79년 첫 음반을 내고 81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의 폭발적 히트까지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에 이어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83년)의 히트로 KBS 방송가요대상 신인가수상과 여자가수상을 연달아 수상한다. '설악산'(84년) '재회'(86년) 등 그가 부른 노래에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인기와 명예, 부(富)가 뒤따랐다.
인기는 금방 사라지는 신기루다. 시샘받기 쉬운 만큼 오래 붙들고 있기는 더 힘들다. 고비는 없었을까. 필자는 대중문화기자로 활동하며 그를 만날 때마다 40년째 한 우물을 파고 있는 포크송 인생과 삶이 궁금했다. 서른다섯 번째 스페셜인터뷰는 봄꽃이 만발한 지난 19일 오후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얼마 전 유럽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부터 알려달라.
네, 모처럼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어요. 언니와 조카들이 함께한 3주간의 유럽 일주였는데 바쁜 일상을 떨쳐낸 힐링의 시간을 만끽한 느낌이에요. 부모님과 오빠가 오래전 세상을 떠난 뒤 저의 유일한 혈육인 언니와 여행을 하면서 인생과 삶에 대해 아주 많은 걸 깨닫고 느꼈어요. 가슴 벅차게 많이 채우고 담아왔죠. 다만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한가지 가슴 아픈 건 파리 중심가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길에 휩싸인 일이에요. 불과 며칠 사이에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하필이면 제가 파리에 들러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직후라 더 안타깝더라고요.
남궁옥분은 최근 스페인을 시작으로 파리 런던 등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는 "40년 가수활동을 하면서 뭐가 그리 바빴는지 나를 돌아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면서 "가수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가족끼리 힐링하는데 할애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랜 기간 싱글로 살면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가족의 울타리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면서 "여행 중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까지 갔다가 시간이 촉박해 내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념사진만 찍은 게 좀 아쉽다"고 했다.
-가수 남궁옥분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한결같다. 데뷔시절부터 늘 변함없는 그 모습, 그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 따뜻한 사랑과 관심,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죠. 유혹을 뿌리치고 저만의 색깔을 지킨다는 게 쉽진 않아요. 트로트로 전향하라는 가요계 분들의 제의와 설득이 꽤 많았거든요. 저의 첫 번째 신념은 분수를 지키고 초심을 잃지 말자는 거예요. 모험이 싫어서가 아니라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의지예요. 저는 포크가수로 데뷔한 이후 음악적 장르는 물론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늘 같은 콘셉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남궁옥분은 데뷔 이후 주로 검은색 아니면 흰색 의상을 고수했다. 그는 "무덤덤한 게 아니라 이미지와 색깔은 겉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방송출연도 자신의 노래 스타일과 맞는 '콘서트7080'이나 '열린음악회' 외엔 되도록 피했다. 이는 트렌드나 유행을 따라 흘러가고, 인기나 대중적 주목을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추구해온 음악적 기준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변사람들과 교감하는 정과 의리도 한결같아서 현재 매니저(김재근)와 호흡만 19년째다.
-80년대는 가요의 전성기였다. 포크송 가수로서도 대중적 인기가 상당했다. 물론 활동이 뜸한 적도 있다.
부모님이 잇달아 떠나셨을 때 심리적 충격을 받은 것 외엔 특별히 인위적인 공백기를 가진 적은 없어요. 거의 꾸준한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그렇게 보인 건 아마 방송에 자주 노출되지 않아서였겠죠.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는 한 시대의 향수처럼 늘 존재했고, 이어져왔으니까요. IMF 무렵부터 미사리에 라이브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어요. 통기타 가수를 중심으로 라이브 열풍이 불면서 한동안 방송에 출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죠.
남궁옥분은 데뷔 2년 만인 81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의 성공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어 '꿈을 먹는 젊은이',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연이어 히트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방송 출연·광고 섭외가 쏟아졌고 80년대 전성기가 열렸다. 돈과 명예는 자연히 따라왔다. 음반 활동은 뜸한 편이어서 93년 '연민'과 2000년 리메이크앨범 '인스피레이션', 그리고 4년전 '사랑'(타이틀곡 '봉선화')을 내놓은 게 전부다.
-미사리 라이브카페의 상징성을 갖고 있지 않나. 당시 처음으로 '출연료 1000만원 시대'를 연 주인공이라고 들었다.
맞아요, 저는 카페 초창기에 생긴 '쉘부르'에 출연했죠. 통기타 가수들이 한 달 출연료가 많아야 300~400만원 하던 때라 1000만원은 큰돈이었어요. IMF 전후였으니까 사회전반으로 온통 경제가 힘든 시기였잖아요. 나중에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나더니 경쟁이 붙어 3000만원까지 치솟았는데 일부 대중가수들 중에는 억대를 찍었어요. 결국 커피 한잔에 2만~3만 원씩 받는 기형적 구조로 카페 운영이 바뀌었고, 순수함이 변질되고 지나친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관객들이 하나둘씩 떠날 수밖에 없었죠.
미사리 라이브카페는 남궁옥분이 일이 없을 때 새 출발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준 곳이다. 출연료보다는 자신의 노래에 환호하고 박수치는 팬들과 교감하는 것만으로 마냥 행복했다. 그는 "미사리 추억은 배가 고파도 관객들과의 친밀한 만남 자체로 저한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개발붐에 땅값이 치솟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현재 미사리에는 남아있는 카페가 윤시내의 '열애' 등 2~3곳에 불과하다.
-'TV는 사랑을 싣고'란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시청자들도 가슴이 찡했다.
누구나 가슴에 담고사는 이별의 아픔은 있잖아요. 스무살 무렵 쉘부르에서 만나 가장 가깝고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예요. 가족들도 서로 잘 알고 지낼 만큼 극진했어요. 음악을 함께하며 하루 종일 붙어다니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전화를 걸어 새벽까지 수다를 떨 정도였죠. 그런데 사소한 오해로 멀어졌고, 이민을 떠나면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어요. 35년간의 회한이 밀려들며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쳤어요.
남궁옥분은 두 달 전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해 인생의 단짝 친구를 찾으러 나섰다. 7080 음악다방 '쉘부르'에서 만났던 동갑내기 친구 한혜정이었다. 한혜정은 남궁옥분의 오빠가 세상을 떠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던 시기에 남궁옥분의 곁을 지켜준 단짝 친구였다. 화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한혜정이 지난 1983년 시카고로 떠났고 긴 결별의 장막 속에 살았다. 남궁옥분은 "만나보니 그 친구도 타국에서 여전히 노래를 하며 집시처럼 살고 있더라"고 말했다.
-오래전 얘기지만 데뷔시절도 궁금하다. 원래 꿈은 대중가수가 아니라 성악가라고 들었다.
누구나 꿈은 바뀌잖아요. 어려서 저는 욕심과 호기심이 유난히 많고 컸어요. 축구 농구 배구 운동을 좋아했고, 음악과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성악도 그중 하나고요. 그러던 중 포크음악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이끌고 있던 구자룡 구자형 형제분을 만난 뒤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 셈이죠. 특히 강인원 씨가 많은 도움을 줬는데 라이브 무대 출연은 그 당시 잘나가던 가수 전영 씨의 펑크 무대에 '땜빵 출연'한 게 계기가 됐어요.
남궁옥분은 중학교 때 이미 음악적 재능이 드러난 끼 많은 소녀였다. 학교예술제 콩쿠르에 솔로로 출전해 입상했다. 여고시절엔 포크송경연대회에 나가 주목을 받았다. 그는 "그땐 유명 레코드사 사장들이 DJ클럽을 몰래 다녀가면서 유망 신인들을 많이 발굴했다"고 말했다. 그 역시 당시 최고의 음반사였던 오아시스 레코드사 손진석 사장한테 발탁돼 '포크송 1호 가수'가 됐다. 데뷔 앨범에 든 '보고픈 내친구'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고 묻혔다가 후에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등과 함께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요즘 음악활동 외에 팝아트라는 미술장르에 심취했다고 들었다. 전시회도 종종 하는가?
스스로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자부했지만 가수 데뷔 이후엔 엄두를 못냈어요. 90년대 초 조영남 선배를 통해 회화의 깊이를 깨달으면서 빠져들게 됐죠. 수채화의 기본에다 아크릴 작업을 개인교습 받으면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2005년 국립의료원 미술관 개관기념 스타전시회에 안성기 최백호 하정우 임혁필 등과 함께 처음 작품을 출품했어요. 이제 저한테 음악과 미술은 별개일 수가 없죠.
남궁옥분의 영역은 팝 아트 장르로 불리는 일러스트다. 그동안 수백 점의 작품을 다양하게 표현해내면서 미술평론가들로부터 '한국의 마티스'라는 평가와 함께 실력을 인정 받을 정도가 됐다. 그의 평소 스타일대로 미술도 한 영역만을 고수해온 덕택이다. 전시 후엔 일부 판매 작품 외에 대부분 지인들한테 나눠주고 50여 점만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번 주(25일)부터 코엑스 초대전에서도 전시된다.
-오래도록 싱글을 고수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만족한 삶이라고 들었다. 때로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나.
어려서부터 뭐든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주변에서 그런 질문을 더러 하는데 솔직히 전 지금도 외로울 틈이 없어요. 친구들이 많아서 쉴 새 없이 어울리는 데다 등산 골프만 다녀도 시간이 부족해요. 다도(茶道)와 더불어 화초를 가꾸고요, 미술작품해야죠, 필라테스 다니죠, 20년째 심신단련을 위해 매일 108배도 해요. 지방 공연 마치고 새벽에 귀가해도 기본적인 운동은 꼭 해요. 살아보니 돈이나 명예, 사랑, 인기도 좋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더라고요.
이런 적극적 대외활동과 함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은 남궁옥분이 나이에 비해 젊게 사는 비결이 됐다.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 역시 평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긍정적 마인드와 일맥상통한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만남을 무려 52년째 유지하고 있다는 그는 "어쩌다 번개 모임을 해도 스무 명은 모일 만큼 돈독하다"면서 "가까운 친구들일수록 잘난 척 하지않고 더 낮은 자세로 격의없이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궁옥분은 70년대 후반 데뷔 이후 80년대 후반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양희은 김세환 윤형주 등 1세대에서 양하영 최성수 등과 함께 2세대 포크가수로 명맥을 이었고, 최근까지 '명품콘서트' '낭만콘서트' '빅4콘서트' 등 7080 콘서트에서 꾸준히 호흡하고 있다. 한때는 초고속 성공이 가져다준 공허함, 꿈과 사랑이 떠났을 때 찾아온 슬럼프, 성대결절로 인한 절망과 좌절도 맛봤다. 하지만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통기타 가수로 팬 곁에 서있다. 가수로서 그는 "요즘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스페셜인터뷰이로 마주한 남궁옥분은 느낌부터 확실히 달라보였다. 2년째 진행중인 EBS FM '남궁옥분의 일요음악여행'은 그가 걸어온 발자취이자 팬들에게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하다. 남궁옥분은 종종 손글씨로 쓴 '명품 문구'를 지인들에게 선물한다고 한다. 필자의 눈에는 이런 수많은 손글씨 중에 그가 바로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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