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6일 평택에서 31년 만에 공식 콘서트 '복귀'
[더팩트|강일홍 기자] 가수 김학래(61)는 '7080 대표 싱어송라이터'다. 세심하고 차분한 성격, 특유의 온화한 이미지 덕분에 '가요계 신사'로 불린다. 1979년 8월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임철우와 부른 듀엣곡 '내가'로 대상을 차지하며 일약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부상했다.
군 복무 후 83년 가수로 정식 데뷔해 부른 '슬픔의 심로'(1집), '해야 해야'(4집) '사랑했었다'(6집) '사랑이란 그런거야'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고, 5집 '하늘이여'는 라디오에서 8주 1위를 지키며 '가요TOP10' 골든상을 수상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한때 연인 사이였던 동료 여자연예인의 '미혼모 스캔들'에 휘말리며 가시밭길을 걷는다. 그를 바라보는 세상사람들은 부득이 결별해야 했던 둘만의 아픔을 이해하기 보다 침묵하는 그에게 '연인을 미혼모로 만들었다' '무책임하다'는 등의 엉뚱한 비난을 쏟아냈다.
온갖 악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는 이후 30년간 모든 걸 숙명처럼 감내하고 살았다. 자신의 해명이 자칫 상대방에게 또다른 상처를 줄까 염려해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상대방이 방송에서 관련내용을 언급을 할 때면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소환되곤 했다. 비슷한 상황은 최근에도, 10년 전에도 벌어진 바 있다.
전성기 시절 열성팬이었던 필자는 매번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그의 심경과 속내가 듣고 싶었다.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그는 "과거를 되돌리고 싶지 않다"며 응하지 않았다. 무려 31년 만에 갖는 그의 첫 콘서트를 코 앞에 두고서야 겨우 마주할 수 있었다. 스물 아홉 번째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8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한 카페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우선 근황이 궁금하다. 31년 만에 공식 콘서트를 갖는다고 들었다. 가수 데뷔 이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니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네 맞습니다. 명동에서 공연한 게 마지막이었어요. 당시에는 콘서트 공간이 많지 않아 인기가수들이 호텔 대연회장에서 공연을 자주 했죠. 환갑이 넘어 30여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는게 믿어지지 않네요. '촛불잔치' 이재성과 함께하는 듀엣콘서트입니다. 저와는 음악적으로도 호흡이 잘 맞는 친구예요. 주변에서 단독콘서트를 권유하는 분들도 많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일단 한걸음을 떼는 게 중요한 일 같아요.
김학래는 오는 16일 평택북부문예회관 대공연장에서 이재성과 '추억을 소환하다, 다시공감 추억의 7080 콘서트'(4시와 7시 두 차례)를 갖는다. 그에겐 전성기시절인 88년 서울 명동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공연 이후 무려 31년 만에 돌아오는 무대다. 이재성은 동갑내기여서 평소 다정다감한 절친으로 지내지만 MBC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따지면 후배다. 김학래가 79년 3회 때 '내가'로 대상을, 이재성은 81년 5회 때 '나의 꿈 그리고 사랑'으로 은상을 수상했다.
-8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가수였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무대와 단절돼 있었다는 게 놀랍다. 최근에도 방송엔 가끔 출연하지 않았나.
네, 맞아요. 방송에 컴백한 건 7년 정도 됐어요. 2012년 12월 24일 KBS2 크리스마스특집 '7080'에 특별가수로 출연한 게 계기가 됐죠. 89년 모든 활동을 중단했으니 TV를 통해 대중 앞에 다시 선 건 대략 23년 만입니다. 무대에서 직접 노래를 다시 부르는 건 공식적으로 처음이니까요.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그 사건' 이후 정말 힘든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해외에서도 8년을 살았는데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저 스스로의 선택이었어요.
김학래는 가수의 신분을 떠나 한동안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가족과 함께 8년간 독일에 거주하며 한국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도중에 수차례 국내 방송출연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모두 포기했다. 그는 "당시엔 가장으로서 가족을 건사하고 사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어쨌든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같다"고 말했다. 20여년만에 가요계 복귀 후 대한가수협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방금 언급한 '그 사건'은 이제 더이상 감출 일이 아니지 않나. 대중은 이미 알고 있고, 더구나 방송인 이성미가 얼마 전 또 한번 '미혼모'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무작정 감추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감춰질 일도 아니고요. 어떤 말을 해도 자꾸 왜곡된 얘기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모두 다 털어놓을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제가 떠안고 가는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주변에선 긴 침묵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저는 '불필요한 논쟁'을 만들지 않는 게 '그분'에 대한 배려이고 남자답게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성미는 지난달 16일 TV조선 예능 '두 번째 서른'에 출연해 "아주 큰 사고를 친 나의 첫 번째 서른은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상대를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김학래' 이름은 하루 종일 검색어 순위를 장악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지만 그는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10년 전인 2010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독일 체류 중이었던 김학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오해가 너무 많아 어느 정도의 진실 규명이 필요함을 느끼게 됐다. 교제를 했지만 더 이상 맞지 않아 헤어졌고, 3개월 뒤 임신 사실을 알았다. 서로 신중한 고민 끝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평화로운 합의를 했다. 이후 상대방이 출산을 했고 지금의 아내와는 그 이후 만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굳이 음악활동을 중단할 이유는 없지 않았나. 마약 사건 같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잖나.
당시 상황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매우 복잡하고 힘들었어요. 둘 다 얼굴이 잘 알려진 신분이라 늘 주시 대상이 됐죠. 한쪽이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아야 잦아들거라고 믿었고, 그럴거면 제가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김학래의 가수활동은 1988년 '사랑하면 안되나'를 끝으로 모두 중단됐다. 그가 대학가요제를 통해 노래를 부른 지 9년 만이다. 70~80년대 아마추어 가수들의 등용문이었던 MBC 대학가요제는 그를 포함해 배철수, 심수봉, 노사연, 우순실, 조갑경, 유열, 이재성, 장철웅, 신해철, 김경호, 전람회(김동률) 등 수많은 스타가수를 배출했다.
-30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이 부분에 대해 반박은 물론, 해명이나 설명조차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 얘기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물으시니 정말 난감하네요. 강 기자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30년째 이 '주홍글씨' 안에 갖혀 살고 있고, 어찌 보면 저를 포함해 주변 사람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설명한다고 해서 진실이 달라지지 않아요. 달라지지 않는데 자꾸 거론해본들 그분이나 저나, 그리고 가족들까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잖아요. 누구나 살면서 한 두번의 치명적 오류나 실수를 할 수 있어요. 다만 그럴수록 진지한 삶을 살아야 만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학래는 인터뷰 중 이 부분에 대해 오히려 필자를 설득하고 여러차례 양해를 구했다. 그는 줄곧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는 것 보단 차라리 입을 다무는게 낫다고 했다. 필자가 '그래도 의혹이 있다면 풀고 털어내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환갑을 넘은 나이다, 이미지 관리를 할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렵겠느냐"면서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모든 걸 다 밝힐 수 없는 그만의 고충이 있는듯 보였다.
-그럼 분위기를 좀 바꿔 질문하겠다. 얼떨결에 대학가요제에 나가게 됐다고 들었는데 무슨 얘기인가?
중고교 시절부터 고 김정호 선배(85년 작고)의 노래를 좋아하긴 했어도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명지대 클래스메이트 임철우가 기말 시험기간 중인데 갑자기 가요제 얘길 꺼냈어요. 첨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거절했는데 철우가 이미 한 두차례 나가 탈락한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대로 된 캠퍼스 추억 한번 만들자'는 생각에 용기를 내고 지원했고, 졸지에 대상을 받게 된거죠.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 '내가'는 강변가요제에도 동시에 접수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군데서 모두 결선에 진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학래는 "원래는 자신이 없어 두 곳을 다 넣게 됐는데 양쪽 모두 결선에 오르고 보니 가요제 관계자들이 오히려 난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우린 어느쪽을 선택해도 상관없는 해피한 상황이었는데 철우가 '기왕 이렇게 됐으니 난생처음 TV에라도 한번 등장하는게 좋겠다'고 해 대학가요제로 결론을 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학창시절부터 좋아했던 팬이었다.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직후 가수활동을 하지 않고 바로 입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대상을 받은 것만으로 영광이었을 뿐 꼭 가수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용돈을 준다고 해서 기념음반 하나 내는 걸로 만족했고, 영장이 나와 자연스럽게 입대를 했죠. 그때까지도 가수할 생각은 안 했는데 군복무 중 제 노래가 계속 라디오를 통해 나오니, 부대 안에서는 이미 인기가수로 대접을 했어요. 휴가 때 내무반에서 틈틈이 쓴 '슬픔의 심로'를 가요관계자들한테 들려줬더니 음반을 내자는 제안이 쏟아지더라고요. 마음을 굳혔죠.
김학래는 전역 후 자작곡 '슬픔의 심로'를 타이틀로 정규 1집을 내고 정식 데뷔한다. 그의 색깔을 고스란히 보여준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앨범에 담은 '겨울바다'도 덩달아 히트했다. R&B 리듬의 '꿈에서 새벽까지'(2집)도 잔잔한 반응을 낸다. 그는 "노래가 다소 어렵긴 했지만 처음으로 뮤직비디오를 소개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새장속에 사랑은 싫어'가 논란속에 금지곡이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해야해야'(4집)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국민적 가수로 부상한다.
-가요기획사에서 매니저로도 활동한 적이 있지 않나. 가요계에서는 김경호를 스타로커로 발굴했다는 얘기도 있다.
가수활동 중단 후 패션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했고, 이런 저런 일들이 모두 다 꼬이면서 힘들어졌어요.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뭐라도 해야한다는 오기가 발동이 됐습니다. 가요기획사(예당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이사를 맡았는데 나중엔 방송사를 뛰어다니며 매니저 역할까지 하게 됐어요. 방송사를 찾아가 PD를 직접 설득하기도 했죠. 당시엔 가요계가 댄스가수 중심이었고, 록은 국내 트렌드에 안맞는다고 거들떠 보지 않을 때였죠. '한번만 믿고 써봐라, 만일 반응이 없으면 두번 다시 부탁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기회를 주더라고요. 무모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끝을 봐야한다고 생각했죠.
김경호는 당시까지 타 기획사 소속이었는데 재능을 알아본 그가 채권 변제 명목으로 당시 사장이었던 변대윤씨(작고)를 설득해 데려왔다. 김학래는 "프레디 머큐리 같은 입체감 있는 가수가 돼줄 것을 믿었다"고 말했다. 그의 줄기찬 노력 덕분에 김경호는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고, 객석을 뒤집어놓을만큼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한번 기회를 잡은 김경호는 국내 첫 샤우팅 가수로 성공한 주인공이 됐다.
-마지막으로 독일에서 한국식당을 하며 지낸 8년의 외국 생활이 궁금하다. 혹시 국내 시선을 피하려는 도피처였나?
도피라니요, 제가 가수로 활동을 하지 않아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이유는 없었어요. 처음엔 아내와 아이가 유학을 떠나 기러기 생활을 했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못살겠더라고요. 그래서 6개월만에 불러들였죠. 그런데 이번엔 아내와 아이가 강력히 되돌아가기를 희망해 결국 온가족이 함께 떠나기로 한 겁니다. 그곳에서 뭔가는 해야했고, 레스토랑을 한번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한국식당을 차린거죠. 육체적으로 고생은 했지만 가장으로서 보람을 느낀 좋은 경험이었어요.
김학래는 가족과 함께 2003년 말 독일로 건너가 살다 2011년 귀국했다. 현지에서 운영한 한국식당은 삼성, 현대, SK, LG 등 국내 기업의 독일 주재원과 그 가족들이 주고객이었다. 수지타산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모든 한국음식을 다 만들어내야하는 게 문제였다. 기본 메뉴 외에 고객들이 '뭐가 먹고 싶은데 좀 해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하면 인정상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직접 주방 일을 하면서 한식은 물론 '한국사람 입맛에 맞는' 중식 일식 양식 등 무려 200여가지 메뉴를 조리해내야 했다. 이때의 고생은 그의 인생 후반 삶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싱어송라이터 김학래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 호기심과 취미처럼 만든 곡 '내가'는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10여곡에 이르는 자신의 주요 히트곡도 모두 직접 썼다. 노래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하나 아니면 전부'를 고집하진 않는 성향이다. 가수활동을 접은 뒤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놨다.
생계를 위해선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가요기획사 매니저 역할을 자임한 적도 있다. 이는 평소 '나 보다는 상대' 쪽 입장에서 바라보는 스타일이 몸에 밴 성격상의 이유도 있다. 덕분에 그는 누구도 강요한 일이 없지만 스스로 오랜 기간 가수활동을 접고 상처입은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필자와 인터뷰를 마친 김학래는 "마침 저녁시간인데 식사나 함께 하자"며 손을 이끌었다. 카페 부근 일식집 주인 김용기씨(일식요리사)는 하필 그의 열성팬이었다. 김씨는 "아무리 바빠도 콘서트에 꼭 가겠다"고 약속했다. 김학래는 사인과 사진촬영을 해준 뒤 "우연히 만나는 이런 분들이 저를 무대에 다시 서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여전히 유명 가수로 대중에 각인돼 있지만 공백기간 살아온 그의 이력은 치열했다. 김학래는 "생리상 비즈니스 체질엔 맞지 않는다"면서도 "어떤 상황이든 닥치면 해내야한다"고 했다. 음악인으로도, 평범한 생활인으로도 그는 솔직하고 인간미가 넘쳤다. 이런 진지한 모습에서 필자는 그가 왜 '그 사건' 이후 30년째 입을 닫고 살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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