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강일홍 기자] "음악은 '희로애락'입니다. 저한테는 노래가 곧 삶이요, 인생이죠. 제가 추구하는 음악은 기교보다 자연스러움입니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으며 뛰노는 것처럼 내 일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소리꾼 장사익(69)은 국내 대중가요계에서 순수 국악 계통의 목소리, 가장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는 가수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광범위하게 인기를 누리는 젊은 대중 인기가수들조차 존경과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일 만큼 독보적이다.
그는 가수 데뷔 전까지 보험판매원을 비롯해 딸기장수, 카센터 수리보조 등 15개의 직업을 거쳐 45세의 늦은 나이에 데뷔했다. 애잔한 울림으로 다가서는 그의 독특한 음색은 올초 '2018 평창 올림픽 폐회식'에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부른 애국가로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공연 때 마다 매진사례가 말해주듯 그는 가요계가 인정하는 대표 뮤지션으로 인정받는다. 다만 '늘 살아움직이는' 티켓파워에도 불구하고 언론과의 대면 인터뷰 기회는 많지 않다. 장사익은 마침 새 음반 출시(9집)가 2019 콘서트 출발선과 만난 시점에서야 필자와의 오랜 교감에 화답하듯 인터뷰에 응했다.
오래 뜸을 들인 만큼 인터뷰는 시작부터 깊이가 달랐다. 그는 진지하거나 흥겨운 분위기에 맞춰 직접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불러주는 등 인터뷰에도 열정과 혼신을 쏟았다. 스페셜인터뷰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콘서트 '장사익 소리판-자화상 칠(七)'(24~25일)을 열흘 가량 앞둔 지난 14일 오후 2시 서울 홍지동에 위치한 장사익의 자택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가요계에서는 가장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는 가수로 정평이 나 있다. 어떤 이유로 그런 평가를 듣는다고 보는가?
김치는 겉저리의 아삭하고 싱그러운 맛도 좋지만 시간을 갖고 발효 숙성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깊은 맛을 냅니다. 저는 기교를 빼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소리로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춤을 추거나 인위적인 제스처를 하지 않아요. 보기에 따라서는 미밋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한편으로는 울림을 주고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사익의 노래는 마치 피가 끓는 듯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오르는 마성의 소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유쾌함이나 기쁨보다는 울적함과 처절한 슬픔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이유다.
-꾸준히 음반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한다는건 젊은 대중 인기가수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음악세계가 궁금하다.
대중 음악과 접목된 제 노래의 본래 뿌리는 판소리이고 치유의 음악입니다. 계절의 변화처럼 소리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요. 소리가 곧 노래이고, 세월의 연륜에 따라 표현도 달라진다고 봐요. 20대 판소리 명창이 없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20년 이상 피를 토하며 수련해야 귀곡성(鬼哭聲)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잖아요.
어린 시절 그는 산에 가서 하루 30번씩 소리를 질렀다. 웅변을 위한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는 "소리꾼이나 대중가수의 성음(聲音)은 천부적으로 타고 날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잘 갈고 다듬어져야 진짜 보석처럼 빛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소 대중 유행가를 많이 접하고 부르며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한다고 했다.
-매우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를 했다. 여러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음악세계로 빠져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정식 음반을 낸 것은 95년 1집 '하늘소리'였는데 사실 데뷔는 1년 전인 94년에 했어요. 생계를 위해 태평소를 배우고 이광수 사물놀이패에서 연주하다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났고, 그 무렵 친구들의 권유로 소극장 공연을 한거죠.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홍대 앞에 있던 예극장은 100석 규모였는데 이틀간 무려 800명이 관람하면서 화제가 됐어요. 이를 지켜본 가요관계자들이 권유해 제가 틈틈이 만들어놓은 '찔레꽃' '꽃섬' 등을 엮어 첫 음반을 내게 됐고요.
장사익은 선린상고 졸업후 서울 종로에 있는 작곡가 사무실을 드나들며 꾸준히 음악공부를 했다. 군복무 후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을 하며 방향이 바뀌었다. 직장운이 없는건지 꿈(음악)과 현실(직업)이 달라서인지 입사하는 회사마다 족족 망하거나 코드가 안맞아 그만 뒀다. 보험판매원을 비롯해 딸기 장수 등 15개의 직업을 가질 만큼 어렵게 살다 공연을 계기로 소리꾼으로 들어선 게 마흔 다섯살 때다.
-그동안 대략 2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타이틀을 바꿔 공연을 해왔다. 이번 무대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공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늘 고민이고 숙제입니다. 이번엔 어느덧 '7학년(고희)'이 된 제 나이를 고려해 '자화상 칠(七)'로 했어요. 지나온 가수 인생을 되돌아보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정리하는 시간도 한번쯤 가져야할 듯해서요. 야구는 9회전이고, 축구는 90분이잖아요. 우리네 삶도 7부 또는 8부 능선을 달릴 때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점수를 잘 냈으면 잘 지켜야하고, 지고 있다면 반전의 기회로 삼는 거죠.
장사익은 내는 음반마다 매번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그대로 투영해 오는걸로 정평이 나있다. 95년 '하늘 가는 길'로 데뷔한 이후 '기침' '허허바다' '꿈꾸는세상' '사람이 그리워서' '꽃구경' '역' '꽃인듯 눈물인듯'을 거쳐 이번 공연에 맞춰 9집 '자화상'을 준비했다.
-세월호 사고 당시 추모 분위기에 휩쓸려 국내 공연계는 사실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모든 공연이 올스톱 된 가운데 당시 유일하게 부산공연을 하지 않았나.
당시 2500석 공연 티켓이 다 팔린 상태라 진퇴양난이었어요. 국가적 불행한 사고가 터지고 전국이 온통 추모열기 속에 공연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고민 끝에 강행을 했는데 다소 밝은 노래인 '열아홉 순정' 한 곡만 빼고 예정된 레퍼터리를 그대로 소화했어요. 제 노래는 대부분 슬픔과 한이 담겨 있고, '슬픔은 슬픔으로 씻겨준다'는 추모 분위기와 궤를 같이할 수 있었던 거죠.
-모친 타계 때 상주인 본인이 직접 '비내리는 고모령'을 불러서 빈소 조문객들로부터 공감을 샀다고 들었다.
맏상주로서 황망한 일을 당하고 보니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돈도, 맛있는 음식도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드니 더 슬펐어요. 그때 퍼뜩 어머니가 막 시집와서 자주 부른 노래가 '비내리는 고모령'이라고 하셨던 게 생각이 났어요. 제가 어렸을 때도 종종 들었던 기억도 있고요. 어머니 영전에 마지막으로 불러드리고 나니 후련하더군요.
장사익은 이후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정운영의 영결식에서 '봄날은 간다'를 불렀고, 신영복 출판기념회에서는 '동백아가씨'를, 작가 이청준 장례식장에서는 미당의 시에 곡을 붙인 '황혼길'을 헌창했다. 그는 "장례장의 빈소는 돈만 내고 공허한 대화만 나누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노래라는 형식을 통해 진정한 슬픔을 교감하는 곳"이라고 했다.
-가요계에서는 워낙 강력한 티켓파워를 갖고 있어서 '나훈아 조용필이 부럽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공감하는 부분인가.
저와는 음악적 색깔이 달라서 나훈아 남진 조용필 등 당대 대중 스타가수들과 비교하는 건 무리입니다만, 공연장에서만큼은 늘 당당하게 서고자 합니다. 저는 평생 노래를 하면서 귀인들을 많이 만난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슬프고 무거운 노래가 대부분임에도 함께 공감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무대에 설 때마다 항상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이 먼저입니다만, 그래서 그들이 부러울 건 없죠.
-독특한 음색 때문에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피어오른다는 느낌이 있다.
듣는 분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평가를 해주시긴 하지만, 아마도 '슬픔'이란 깊고 강렬한 페이소스가 버무려져 더 그렇게 느껴지는게 아닐까요. 나이를 먹어갈수록 감성과 슬픔의 바이브레이션이 더해지는 것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가장 중요한 건 진실성이죠. 껍데기로 부르면 깊은 맛을 담아낼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목소리 외엔 어떤 기교(MSG)도 가미하지 않는다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어요.
늘 그래왔듯이 장사익은 대중성을 추구하지 않는 가수다. 반면 자신의 음악이 남녀노소 모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5년 3월 2일 KBS 1TV에서 방송한 '공사창립 특집 콘서트 이미자-장사익'은 지상파 3사 인기 드라마를 제치고 시청률(20%)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니아 팬들은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어떤 노래를 부를지 늘 궁금해한다. 9집 수록곡들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평소 좋아하는 시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많이 해요. 일상에서 늘 흥얼거리며 음율을 만드는데, 딱 공감이 가는 글을 접하면 비로소 옷이 입혀지게 되는 셈이죠. 엄밀히 말하면 곡을 쓰는 게 아니라, 곡을 엮는다고 해야할까요. 이번에 특별히 한 대학원생이 고교시절 쓴 '바보온달'이라는 글에도 곡을 붙여봤는데 참 재밌어요.
새 음반 수록곡에는 북 하나에 의지해 음을 띄우기도 하고 재즈 비트에 싣기도 하고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투영했다. 허영자 시인의 '감', 마종기 시인의 '상처' 등의 시도 포함됐다.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수록곡 '상처'의 가사 일부)
-한때 성대 결절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매번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이듬해 공연의 시발점인데 목소리에는 자신이 있나.
2015년 말부터 조금씩 무리가 생겨 2016년 초에 처음으로 성대결절이 생겼어요. 가수한테는 목소리가 생명인데 덜컥 겁이 났죠. 다행히 수술이 잘 됐고, 꾸준히 관리를 해 지금은 큰 문제가 없어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약간씩 변화해가는 목소리 역시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이번이 15번째 무대다. 공연을 앞두고 서울 방배동 연습실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스태프와 만나 모두 네 차례 연습 가졌다. 매일 새벽 일어나 운동을 하고 한 시간 반씩 소리로 목을 푸는 일은 지난 25년간 변함이 없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장사익만의 색깔'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여타 가수들과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눈물의 인생'을 노래하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노래를 하면서 인생을 배우지만 저는 인생을 배우고 난 뒤에 노래를 시작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엔 희로애락이 늘 상존하지만 힘든 사람이 훨씬 더 많잖아요. 그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씻어 같이 갈 수 있게 해주는 노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픔은 슬픔으로 달래야 개운해지는 이치인 셈이죠.
그가 평소 시에 음율을 담고 새기는 것은 가사의 중요성 때문이다. 시인들이 갈고 닦은 시는 곧 가사이고, 여기에 고, 저, 장, 단 감정을 넣어 대중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공연 타이틀 역시 마찬가지다. 고심 끝에 탄생시킨 새 앨범이 곧 공연 타이틀이 된 경우가 많다.
-항상 감동의 멋진 공연으로 객석을 가득 채운다. 앞으로 공연활동을 계속 기대해도 되나?
제 노래 인생은 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기대하셔도 됩니다. 노래라는 게 꼭 목청이 좋아야만 평가를 받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테크닉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제 호흡대로 노래를 부르고 판소리든 대중 가요든 따로 구분하지 않죠. 본질은 바로 '노래'일 뿐이에요. 90살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서도 그 자체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어요. 저에게 그런 날이 온다면 더없는 영광이겠죠.
장사익은 장르 구분을 따로 하지 않는 가수다. 겉모양 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순리를 중시한다. 자신의 곡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동백아가씨'나 '대전블루스' 등 대중의 귀에 익숙한 가요를 리메이크해 재해석하기도 한다. 공연장에서도 하얀 두루마기 의상 하나면 족하다. 그는 "80살이 되면 '자화상 팔(八)', 90살이 되면 '자화상 구(九)'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기타 반주의 구성진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원곡가수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는 이후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했지만 같은 노래라도 장사익이 부르면 느낌이 다르다. 대화 도중에도 그는 몇개의 노래를 직접 기타반주로 불러주기도 했다.
스페셜인터뷰 말미에 그는 "강 기자님이 몸담고 있는 <더팩트>와의 첫 인연을 소중한 기억과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재에서 들고 나온 붓을 들어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더팩트는 眞實만을 이야기 합니다, 2018년11월14일 장사익'이라고 단숨에 썼다.
그가 부르는 울림의 노래처럼 기교 보다는 숙성된 깊은 맛이 진한 먹물을 통해 강렬하게 흘러넘쳤다. 예상치 못한 스페셜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창문 너머 붙잡힐 듯 북한산 끝자락과 맞닿은 늦가을 인왕산 풍경이 유난히 운치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