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은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와 감독 부부의 납북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그로부터 34년 흐른 2018년 4월19일 오늘, 엄앵란-김지미와 함께 195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명성을 날렸던 최은희는 조국과 남편의 품에서 영면했다. 납북과 탈북, 이혼과 두 번의 결혼 등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았던 최은희는 배우 한지일, 문희, 신성일 등 고인을 기억하는 수 많은 영화인들의 애도 속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최은희는 흰 저고리와 치마가 잘 어울리는 한국적인 미인이었다. 대표작은 1961년 개봉한 '춘향전'이다. '춘향전'은 서울서만 74일간 38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2012년 통계청이 발표한 '2011 서울통계연보'를 보면 1960년 당시 서울의 인구는 244만5000명이다. 어림잡아 서울 시민 7명 중 1명은 최은희가 주연하고 남편 신상옥 감독이 만든 '춘향전'을 본 셈이다. 앞으로도 쉽사리 깨지지 않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다. 이후에도 최은희는 주요섭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나도향 원작 '벙어리 삼룡이' 등 신상옥 감독이 만든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유교적 인습에 따르면서도 강인한 여인의 내면을 탁월한 연기로 스크린에 수 놓았다. 아울러 영화 '민며느리', '공주의 짝사랑'을 직접 연출하기도 하며 감독으로서 능력도 인정 받았다.
영화 배우와 감독으로 승승장구할 거 같았던 최은희는 일생일대의 시련을 마주한다. 1978년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공작원은 홍콩에서 최은희를 납치해 북으로 끌고 갔다. 훗날 수기에서 최은희는 '김정일은 거의 매주 금요일 나를 불러내 파티를 열었다'고 썼다. 단골손님은 김정일과 장성택 부부 등이었다. 사라진 최은희의 행적을 쫓다 5년 뒤인 1983년 함께 납치됐던 신상옥 감독은 '목포의 눈물', '노란 샤쓰의 사나이', '동백아가씨', '하숙생' 같은 남쪽 가요가 파티장의 단골 레파토리였다고 말했다. 최은희는 "북한에 있던 8년 동안 나는 인생에서 가장 긴 연기를 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의 사연은 영화로 제작됐다. 2016년 영국의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애덤 감독은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의 납치와 탈출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개봉했다. 두 사람은 "이 사건을 들었을 때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에는 최은희, 신상옥 감독이 목숨 걸고 녹음한 김정일의 육성이 담겼다.
최은희는 2006년 부군 신상옥 감독 타계 후 오랜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최은희는 생애 마지막까지 사랑을 전했다. 생전 두 눈을 기증하기로 서약했던 것.
격동의 현대사의 한 가운데서 혼을 담은 연기와 영화 같은 삶을 살아간 최은희는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국의 하늘 아래 남편 신상옥 감독 곁에서 영원한 잠에 빠졌다. 그녀의 곁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남과 북, 세계를 누비며 사람을 웃기고 울리던 당신. 사람들은 그를 영원한 영화의 큰 별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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