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강일홍 기자] 방송인 김종하는 13년간 명물 전통 시장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유명 전통시장만 650 군데 이상 훑으며 말그대로 시장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안가본 데가 없을 정도다.
그는 '김종하의 장터 사용법'을 10여년간 진행하며 KBS 1TV '6시 내고향' 어엿한 터줏대감이 됐다. 요즘은 매주 금요일마다 전통시장 구석구석을 소개, 자연스럽게 이 프로그램의 전통시장 살리기 프로젝트에도 앞장 서는 주역이 됐다.
"촬영장소가 시장이라는 특성 때문에 항상 생동감이 넘칩니다. 전통시장은 어느새 저의 상징이 됐고요. 시장사람들도 이제는 으레 한가족처럼 정겹습니다. 처음 뵙는 분들조차도 단 1cm의 거리감도 없어요. 만나면 그냥 이심전심 통하니까요."
초대가수들과 함께 명물 전통시장을 소개하는 코너는 김종하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나면서 시청자들을 포근히 끌어안는다. 개그맨 특유의 위트와 말솜씨가 더해져 흥미와 재미를 더한다.
함께 '6시 내고향'에 단골 멤버로 출연중인 동료방송인 조문식은 "춥거나 덥거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현장을 지키며 혼신을 다하는 (김)종하를 보면 후배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면서 "프로다운 면모와 사람냄새가 배어있어 시청자들한테 더 친근감을 주는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유쾌한 이미지의 대명사로 활약중인 김종하에게도 알고보면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아픔이 있다.
김종하는 중고시절 전통시장인 경기도 성남 성호시장에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가산을 다 잃은뒤 시장에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기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학교 수업을 마치면 어김없이 부모님을 도왔고, 여름엔 얼음배달 겨울엔 연탄배달로 구슬땀을 흘렸다. 하루에 리어카와 지게로 달동네를 누비며 연탄 2천장을 배달한 적도 있다.
"당시 성남은 언덕이 많아서 유독 힘들었어요. 한번은 성일여상 쪽 언덕길에서 연탄리어카를 끌고 있는데 갑자기 가벼워졌어요. 뒤를 돌아보니 성일여상 야간 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시커먼 연탄위에 책가방을 올려놓고 밀고 있더라고요. 이름도 모르는 그 여학생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종하는 그 때의 찡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틈틈이 이웃사랑 봉사활동을 하는데는 그런 기억들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는 가난했지만 시장에서 부모님 일손을 거들어주는게 무엇보다 행복했다.
"이제와서 후회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방학 때 하루도 못 놀고 부모님을 돕다 보니까 저도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요. 놀고 싶은데 못 노는 제 처지가 화가 나 연탄배달을 하려고 쌓아논 연탄 위에 올라가서 사정없이 발로 밟고 차서 깨트리고 울먹이며 뛰쳐나갔습니다. 한 30여장은 족히 깨뜨렸을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는 혼내기는 커녕 아무 말씀도 없이 깨진 연탄을 주섬주섬 치우더군요."
사춘기를 지난 뒤에야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고생하는 부모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드리고 싶어 개그맨을 꿈꿨다. 이후 6전 7기의 집념 끝에 1989년 MBC 개그맨 콘테스트 3기로 방송에 입문했다.
김종하도 한때는 '일요일 일요일밤' '웃으면 복이와요' 등 7080 콩트개그의 끝자락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30년 가까운 그의 방송 경력과 내공은 요즘 전통시장 MC를 통해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다.
"궂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마이크 앞에 서는 게 저의 사명이자 생활입니다. 마이크를 잡을 때 가장 행복하죠. 한우물 판 덕분일까요. 차츰 좋은 일도 생기네요. 얼마전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미슬로 샴푸 CF를 촬영했어요."
이 광고는 현재 케이블 등에서 방영중이다. 타고난 달변가인 그는 요즘 OBS W '명품가요수첩' MC를 맡고 있다. 전국을 누비고 다니다보니 각종 홍보대사 이름표를 무더기로 달았다. 부산광역자활센터, 부산광역시 사회적 경제연합, 대한장애인역도연맹, 음성군 등에서 홍보대사로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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