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탐정'처럼 시리즈로 제격
[더팩트|권혁기 기자]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해 주십시오." 조선시대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이 의적으로 활동하며 유토피아를 건설했다는 내용이 담긴 허균의 '홍길동전'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한국에서 드라마, 영화, 만화, 심지어 게임으로까지 제작될 정도로 단골 소재다.
대부분의 콘텐츠들은 '홍길동전'의 시대적 배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난 2008년 종영된 KBS2 드라마 '쾌도 홍길동'이 전형적인 영웅담에서 벗어나 코믹하게 담아냈지만 이 역시도 배경은 조선시대였다.
4일 개봉된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감독 조성희, 제작 영화사 비단길)은 고전을 재해석했다. 이미 '늑대소년'으로 남다른 연출력과 상상력을 검증받은 조성희 감독의 신작이다.
1970~80년대, 휴대전화 대신 공중전화기에 10원짜리를 넣어가며 전화를 걸던 시절 홍길동(이제훈 분)은 누군가를 절실히 찾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박근형 분).
어렵사리 찾아낸 김병덕의 실마리는 강원도 화천 도계면 명월리에 있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거대 조직 광은회 일당에게 김병덕을 빼앗긴 홍길동은 김병덕의 두 손녀 동이(노정의 분)와 말순이(김하나 분)를 데리고 다니며 수사를 시작한다.
조성희 감독은 '홍길동'을 재해석했다기보다 재탄생시켰다. '탐정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조직 활빈당은 불법 흥신소이며, 홍길동은 어릴 적 사고로 좌측 해마를 손상당해 감정 인지 능력과 8살 이전 기억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김병덕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히 남아 있어 20년 동안 그를 쫓아다닌다. 특기는 거짓말하기, 거짓말하는 사람 알아채기.
어찌 보면 악당보다 더 악랄하다. 홍길동은 자신을 없애려는 악당들을 유인해 서로의 손가락을 자르라고 지시한다.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 삼아 잔혹한 형벌을 내리며 "감히 홍길동님께 대적하려고 한 벌이다"라고 말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그 어려운 대사를 이제훈이 해냈다. 코믹 연기부터 히스테릭한 홍길동의 감정을 매끄럽게 소화했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푸근한 이미지를 구축했던 김성균(강성일 역)은 제대로 된 '끝판왕' 악역으로 돌아왔다. 광은회의 실질적인 실세로 쿠데타를 꿈꾸는 인물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낸 김성균은 제 옷을 입은 듯 관객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독일 나치 친위대를 연상시키는 롱 가죽 재킷은 김성균의 캐릭터를 잘 살렸다.
압권은 아역배우였다. 영화 '더 폰', 드라마 '피노키오' '마의' 등을 통해 일찌감치 떡잎부터 알아본 노정의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특히 말순이를 연기한 김하나는 '탐정 홍길동'이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기성배우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김하나는 소소한 재미가 아닌 '탐정 홍길동'의 모든 코믹적인 부분에 한몫을 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영웅'의 안중근 등 선 굵은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정성화는 제대로 신(scene)을 스틸 했다. 2편이 제작된다면 또 보고 싶은 인물 중 하나다.
활빈당의 황회장을 맡은 고아라는 분량이 아쉬웠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허투루 연기하지 않았다. 김성균만큼의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배우들의 연기 외에 '탐정 홍길동'의 또 다른 볼거리는 CG로 제작된 풍경이다. 조성희 감독은 고담시를 연상시키는 도시를 떠나는 홍길동의 자동차 스텔라가 허허벌판을 달리는 장면은 고향에 대한 향수마저 일으켰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수작으로 꼽히는 범죄액션 영화 '씬시티'의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했다.
고전 '홍길동전'이 서민들의 애환을 잘 담아냈다면 '탐정 홍길동'은 홍길동의 내면과 영웅 아닌 영웅 홍길동에 주목했다. 소재로 쓰였지만 전혀 새로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탐정 홍길동'은 '전우치'에 이은 새로운 한국형 히어로의 탄생 서막이 될 전망이다.
조성희 감독의 손길에서 재탄생된 '탐정 홍길동'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러닝타임은 1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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