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을'들의 생존권을 흔드는 것일까
주연과 조연, 단역에 출연료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항상 출연료 미지급 사태에 가장 큰 직격타를 맞는 건 '을'이다. 계속 반복되는 문제인데도 '갑'인 방송사 또는 제작사, 그리고 '을'인 배우들의 악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 '재정 부실' 외주제작사-'외주 선택권' 방송사…진짜 잘못한 '갑'은?
표면적으로 출연료 미지급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제작사다. 막상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 외주제작사는 "제작비가 적자다. 콘텐츠 판매 대금이 들어오면 정산하겠다"고 차일피일 미루는 모양새다. 정작 외주제작사에 일을 맡긴 방송사도 "외주제작사에 이미 제작비를 줬다"고 관망만 하고 있다.
작품 편성 전 방송사가 외주제작사를 정할 때 여러 가지 고유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콘텐츠의 질부터 재무 안전성, 필모그래피, 작가, 주인공, 경험 등 다양한 부분을 고려하고 결정을 내릴 것이다. 까다롭게 선정된 제작사임에도 가장 기본적인 출연료 지급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모순이기도 하다.
한 관계자는 "방송사에서 외주제작사를 선택할 때 어떤 PD 라인이냐에 따라 전관예우도 있는 게 사실이다"며 "재무재표를 객관적으로 확인하지 않고 인맥으로 작품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배우는 "방송사에서 작품을 만들라고 준 제작비를 다른 용도로 쓰니까 모자라는 것 아니겠냐"며 "배우들은 드라마 중반에 중도금을 받고 종영 후 나머지를 정산하는데 이미 중도금부터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제작비가 빨리 바닥이 나는 경우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출연료 미지급 사태에 휘말린 제작사 목록을 보면 이름이 익숙한 큰 유명 제작사는 찾아볼 수 없다. 해당 작품을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한 중소제작사가 대부분이다. 물론 한번에 대규모 제작사로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작품이 말 그대로 흥행을 거두지 못하거나 예상을 빗나가는 돌발상황 때문에 제작비가 모자랄 수 있다. 몇몇 관계자들은 "방송사의 제작비 투자 방식도 다양화되면서 외주제작사가 처음부터 각박한 재정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배우 조성규는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제작사에서는 나중에 제작비가 없다고 하면 그만, 방송사는 제작사가 그들의 하청업체임에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주연 배우들도 출연료를 못 받긴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같은 배우들, 스태프는 방송사와 제작사의 '갑질'에 생활이 흔들린다"고 호소했다.
◆ 4년째 동결인 등급별 출연료…배우들 신문고 없다
지상파 3사의 '탤런트 및 코미디언 출연료 기준표'를 보면 배우들의 출연료는 KBS는 2011년, MBC와 SBS는 2012년 이후 멈춰 있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과 KBS의 오랜 법적 분쟁 때문에 협상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배우들은 5년 전에 적용된 임금 수준을 지금까지 적용받고 있다.
한연노는 지난 1988년 설립돼 배우들의 출연료와 복지에 대해 방송사들과 협상하는 창구 역을 했다. 하지만 2011년 7월 복수노조가 허용되면서 한연노까지 KBS노조에 권리를 위임하고 KBS와는 간접적으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이럴 경우 한연노는 KBS에 종속되는 셈이고 자연스럽게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연노는 KBS노조를 통하지 않고 따로 교섭하겠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한연노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어 중앙노동위원회(이하 중노위)는 한연노의 교섭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연노는 중노위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서울고등법원은 "연기자들은 근로자"라고 한연노를 노조로 인정했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과정이지만 한연노는 단일화 된 교섭단체로 인정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KBS와 협상대에 앉지도 못하고 있다.
배우들을 보호하고 감싸줄 터가 탄탄하게 자리를 다지지 못한 상황이다. '을' 입장에 있는 배우들의 권리를 제대로 지켜줄 방패막이 없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우들은 출연료 지급 문제가 있는 환경을 자각한 후에도 스스로 희망고문하며 일단 촬영을 끝까지 진행한다. 그리고 피해는 재발하는 악순환이다.
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차장은 "밤을 새도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배우들인데 복리후생은 바라지도 않는다. 현장에서 일한 출연료만 기본적으로 받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입법적인 부분도 필요하지만 피해를 입은 배우들도 적극적으로 신고를 해줘야 한다"고 인식 개선을 부탁했다.
출연료의 격차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갑'의 횡포에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이 무너질 수 있다. 흥미로운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방송가, 소리 없는 갑과 을의 전쟁이 끝나기 위해선 결국 더불어 살기 위한 상생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 뿐이다.
[더팩트 | 김경민 기자 shin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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