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성지연 기자] "난중일기는 내가 기댈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습니다."
배우 최민식(53)이 '성웅' 이순신을 연기한 비법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진중에서 직접 쓴 일기를 읽어 보는 것. 이순신을 연기하는 배우가 난중일기를 참고하는 것은 굉장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유일하게 기댄 곳과 참고한 자료 또한 난중일기다. 이순신에 관한 서적을 훑긴 했지만, 자세히 읽은 것은 난중일기가 유일하다고 했다. '연기파' 배우의 자신감일까?
최민식을 떠올리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도 반기를 드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경력과 연기력 모두 빼어난 배우임이 확실하다. 1988년 영화 '수증기'로 데뷔한 27년 차 배우 최민식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넘버 3' '쉬리' '친절한 금자씨'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지난 2002년 개봉한 영화 '취화선'으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분에 처음 진출한 이후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고 최근에는 북미에서 먼저 개봉한 뤽 베송 감독의 작품 '루시'로 평단의 호평을 얻고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와 화려한 수상경력을 훑고 있자니 최민식이 자신감 때문에 '명량'을 준비하며 난중일기만 참고했을 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팩트는 그 반대다. 최민식이 들려준 '명량'의 준비과정을 들어보면 지금껏 그가 쌓아온 화려한 명성이 조금은 고집스러운 그만의 '연기 철학' 때문에 가능했단 걸 짐작하게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이순신. '성웅'(성스럽다)이란 칭호를 가진 위인을 연기하는 것은 어떤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최민식 또한 몇 번이고 김한민 감독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 '연기파' 최민식에게도 '성웅'이란 칭호에 도전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지난 6월 열린 '명량'의 제작보고회와 지난달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며 "나 스스로가 초라해질 정도로 이순신이란 존재의 엄청난 존재감에 부딪혀 어려웠다"고 말했다.
출연을 고민했던 그는 이순신의 방대한 업적과 굳건한 신념을 담고자 하는 마음에 어렵사리 출연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를 연기해야 한다는, 그것도 굉장히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순신을 '제대로' 연기하고자 하는 마음에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난중일기에 집중하고 임진왜란에 희생당한 조상들을 위해 씻김굿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기존 작품이 있는 작품에 캐스팅된 배우들은 원작을 찾아본 뒤 과거 다른 배우가 연기한 작품을 찾아보기 마련이다. 이순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영화 외에도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하다. 하지만 최민식은 그 흔한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에 집중했다. 답없는 '장군님'을 홀로 부르며 안타까워 하던 고뇌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배우가 다른 이들이 연기한 이순신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비교할 기회가 되고 좋은 부분은 참고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최민식은 '인간 이순신'을 이해하고 싶었고 '진짜 이순신'이 아닌 이순신을 연기하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했다. 상업성을 배제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이순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중압감을 느끼며 연기하고 싶었다는 의미다.
최민식은 '명량' 시사회가 끝난 뒤 아쉬움과 만족스러운 표정이 한데 섞인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감개무량하다. 연기자가 그 선택을 두려워하거나 자존심이 상하면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온 국민이 충무공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두고 이 작품과 제 연기를 봐 주시는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가 왜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로 불리는지, '명량'이 올여름 관객들의 마음에 뜨거운 영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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