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을 계기로 국내 인공지능(AI)·반도체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SK텔레콤, SK하이닉스, 네이버 등 국내 주요 기업과 엔비디아의 협력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AI 인프라와 반도체 공급망이 국가 성장전략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금융권도 가계대출과 부동산 중심의 자금 공급에서 벗어나 AI·반도체 등 첨단산업으로 자금을 돌리는 생산적 금융 확대를 과제로 안고 있다.
10일 산업계와 금융권 등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한국 주요 기업들과 잇달아 AI 인프라 협력 방안을 발표했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 DSX 플랫폼을 활용해 국내에 기가와트급 AI 클라우드를 구축할 계획이다. 첫 AI 팩토리는 오는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이 AI 클라우드가 국내 기업과 산업 전반의 소버린 AI, 피지컬 AI, 에이전틱 AI 서비스를 지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와의 협력도 강화됐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는 AI 팩토리 확산에 필요한 차세대 메모리 공동 개발을 위한 다년간 기술 파트너십을 맺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첨단 메모리가 AI 데이터센터와 AI 슈퍼컴퓨팅 인프라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만큼, 메모리 공급망 확보와 기술 고도화가 AI 경쟁력의 중요한 축이 됐다는 평가다.
네이버도 엔비디아와 AI 인프라 협력을 확대한다. 엔비디아 발표에 따르면 네이버는 55메가와트 규모에서 시작해 향후 기가와트급으로 확대하는 소버린 AI 인프라 구축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는 국내 기업과 산업, 공공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AI 플랫폼을 키우겠다는 구상과 맞닿아 있다.
젠슨 황 CEO의 방한이 금융권에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AI 경쟁은 기술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규모 장기 자금을 누가,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공급하느냐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GPU와 HBM,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냉각 시스템, 반도체 생산라인, 스타트업 연구개발까지 AI 생태계 전반에는 막대한 투자 재원이 필요하다. 금융권이 생산적 금융을 앞세워 AI·반도체 분야로 자금 공급을 확대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융권 역시 AI 확산의 직접적인 수요자다. 은행들은 생성형 AI를 고객 상담, 자산관리, 기업여신 심사, 내부 보고서 작성, 리스크 관리 등 핵심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앞서 신한은행의 생성형 AI 기반 AI 은행원과 투자·금융지식 Q&A 서비스, KB국민은행의 생성형 AI 금융상담 에이전트, NH농협은행의 생성형 AI 플랫폼 기반 금융서비스 등을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한 바 있다. 이후 생성형 AI 모델 변경 절차도 간소화되면서 금융권의 AI 서비스 출시 속도는 더 빨라질 전망이다.
개별 금융그룹과 은행의 AI 내재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KB금융은 그룹 공동 생성형 AI 플랫폼인 'KB GenAI 포털'을 열고 금융상담, PB, RM 지원 등 업무에 AI 에이전트를 활용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생성형 AI 기반 AI 은행원과 투자·금융지식 Q&A 서비스를 통해 자연어 기반 금융 상담과 시장 정보 제공 기능을 고도화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생성형 AI 기반 'HAI 상담지원봇'을 개편해 상담 내용을 실시간으로 요약·분류하는 업무에 적용했고, 기업 신용평가 심사의견 생성 시스템도 전국 영업점에 도입했다. 우리은행은 생성형 AI 기반 '심층 리서치'를 자체 개발해 내부 금융 데이터를 활용한 산업·기업 분석 보고서 초안 작성에 적용하고 있다. NH농협은행은 'NH 에이전틱 AI 뱅크' 비전을 선포하고 자체 AI 플랫폼을 기반으로 임직원이 AI 에이전트를 직접 제작해 업무에 활용하는 체계를 추진하고 있다.
은행권의 AI 활용 확대는 생산적 금융과도 맞닿아 있다. AI와 반도체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려면 단순 담보가 아니라 기술력, 시장성, 공급망 내 위치, 사업화 가능성을 평가해야 한다. 금융회사들이 상담과 여신, 리서치, 리스크 관리 영역에서 AI를 직접 활용하기 시작한 만큼, 향후 첨단산업 투자와 기업금융 심사에서도 산업 이해도와 데이터 분석 역량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도 금융의 자금 흐름을 부동산과 가계 중심에서 첨단산업으로 옮기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향후 5년간 총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해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방산, 로봇,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미래차 등 첨단산업과 밸류체인 전반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성장펀드는 이미 AI 반도체 분야에도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금융위는 지난 4월 국민성장펀드 전략위원회에서 국내 AI 반도체 기업에 6400억원 규모의 직접투자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대규모 투자 확충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금융위는 국민성장펀드 자금 중 약 3분의 1인 10조원가량이 반도체와 AI 분야에 공급될 예정이라고도 설명했다.
민간 금융회사들의 참여도 확대되는 분위기다. 금융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5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NH농협)는 자체 집계 기준 생산적 금융으로 43조8000억원을 공급했다. 5대 금융지주는 국민성장펀드 사무국에 16건의 딜을 제시했고,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사업성 등에 대한 실무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금융위는 단순한 실적 채우기가 아니라 첨단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 발굴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정책금융기관인 IBK기업은행도 별도로 생산적 금융 확대에 나서고 있다. 장민영 기업은행장은 취임사에서 2030년까지 300조원을 투입하는 'IBK형 생산적 금융 프로젝트'를 통해 AI, 반도체, 에너지 등 미래 신산업과 혁신기업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과제도 적지 않다. AI와 반도체 산업은 성장성이 크지만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르고 초기 투자 부담이 크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시설은 장기 자금이 필요한 반면 AI 스타트업은 매출과 수익성 검증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은행권이 기존 담보와 재무제표 중심 심사 방식에서 벗어나 기술력, 시장성, 산업 파급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은행권의 생산적 금융이 단순한 대출 확대에 그치지 않고 AI·반도체 산업의 성장 자금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가 향후 관건이다. AI를 금융 서비스에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은행들이 AI 산업의 성장성과 위험을 평가하고 장기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느냐가 생산적 금융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AI와 반도체는 성장성이 큰 산업이지만 투자 규모가 크고 기술 변화 속도가 빨라 전통적인 담보 중심 심사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며 "생산적 금융이 성과를 내려면 단순히 자금 공급 규모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 이해도와 기술평가 역량을 함께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