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만 빌려줬다" 안 통했다…도이치 판결, 작전주 '돈줄' 겨눌까


20억원 계좌·18만주 매도 '시세조종 가담' 판단
계좌기반 감시서 개인기반 감시로…전주·계좌주 책임론 부상

통일교 현안 청탁 명목의 금품 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건희 여사는 지난 28일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박헌우 기자

[더팩트|윤정원 기자]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가 항소심에서 일부 유죄로 뒤집힌 가운데,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사건에서 계좌·자금 제공자의 책임 범위에 이목이 쏠린다. 대법원에서 항소심 판단이 유지되면 직접 주문 실행자뿐 아니라 작전 거래의 자금과 계좌를 제공한 주변부 참여자까지 책임 추궁 범위가 넓어질 전망이다.

◆ '계좌만 제공' 주장, 어디까지 통할까

서울고법 형사15-2부는 지난 28일 자본시장법 위반, 정치자금법 위반,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건희 여사에게 징역 4년과 벌금 5000만원을 선고했다. 1심 징역 1년 8개월보다 형량이 늘어난 것이다. 재판부는 6220만원 상당의 그라프 목걸이 1개 몰수와 2094만원 추징도 명했다.

증권가가 주목하는 대목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에 대한 판단 변화다. 1심은 해당 혐의를 무죄로 봤지만, 항소심은 김 여사가 2010년 10~11월 블랙펄인베스트 측에 20억원이 들어 있는 증권계좌를 제공하고 도이치모터스 주식 거래를 맡긴 행위, 이 시기 도이치모터스 주식 18만주를 매도한 행위를 시세조종 가담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 여사가 시세조종 범행을 주도하지 않았고 가담 기간도 비교적 짧다는 점을 유리한 양형 사유로 고려했다. 그러나 계좌와 자금이 시세조종 과정에 활용된 책임 자체는 인정했다. 김 여사 측이 선고 직후 대법원 상고 방침을 밝힌 만큼 최종 판단은 남아 있지만, 항소심 판단만으로도 주가조작 사건에서 계좌 제공자의 법적 책임을 둘러싼 논의에 불이 지펴졌다.

주가조작 사건에서는 실제 주문자와 자금 제공자, 계좌 명의자, 보유 물량 처분자가 분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관련자들은 "직접 주문을 넣지 않았다", "전문가에게 투자를 맡겼을 뿐이다", "시세조종 목적은 몰랐다"는 식으로 책임을 부인해 왔다. 이번 판결은 이 같은 방어 논리가 자금 제공 경위와 매매 시점, 수익 귀속 구조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읽힌다.

◆ 작전주 '외곽' 아닌 '핵심 고리'…전주·계좌주 역할 재부각

도이치모터스 항소심 판결은 국내 작전주 생태계의 구조적 문제도 다시 부각시켰다. 주가조작은 통상 한 명의 주문자가 호가를 움직이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다수 계좌를 통해 매수·매도를 반복하고, 통정매매나 가장매매로 거래량을 부풀린다. 외부 자금과 보유 물량을 동원해 시세 흐름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방식이 결합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전주와 계좌주는 겉으로는 작전의 외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세를 만들 수 있는 실탄과 거래 통로를 제공하는 핵심 고리로 기능한다. 특정 계좌의 시세관여율이 높아질수록 감시망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여러 명의 계좌를 쪼개 활용하는 방식은 작전세력의 오래된 회피 수단으로 꼽혀왔다.

문제는 단순한 투자 위탁과 시세조종 가담의 경계가 늘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계좌 운용을 맡겼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시세조종 책임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계좌가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 △계좌 명의자가 거래 목적을 인식했는지 △매매 결과로 이익을 얻었는지 △주문 권한과 보고 체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등이 함께 따져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항소심 판단은 향후 유사 사건에서 자금과 계좌의 흐름이 더 촘촘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작전의 설계자와 주문 실행자만이 아니라 자금 제공자와 계좌 명의자에게도 시세조종 구조를 알고 관여했는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해석이다.

◆ 계좌기반 감시 한계…당국은 '개인기반'으로 전환

이번 판결은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의 시장감시 체계 변화와도 맞물린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24년 1월 19일부터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과징금 제도를 시행했다. 미공개중요정보 이용, 시세조종, 부정거래 등 3대 불공정거래에 대해 부당이득의 최대 2배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부당이득이 없거나 산정이 곤란한 경우에도 40억원 한도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처벌 방식도 형사처벌 일변도에서 경제적 제재 병행으로 이동하고 있다. 금융위는 지난해 3대 불공정거래 과징금 제도 도입 이후 첫 과징금 부과 사례를 냈다. 다만 해당 사례는 시세조종이 아니라 미공개중요정보 이용 금지 위반 사건이었다. 제도 도입의 방향성은 불법이익을 빠르게 박탈해 불공정거래 유인을 낮추겠다는 데 있다.

시장감시 방식도 계좌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기존 거래소 감시는 개별 증권계좌의 거래내역을 분석하는 구조였지만, 동일인이 여러 증권사 계좌를 활용하면 다수 명의로 쪼개져 탐지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당국은 동일인을 기준으로 거래를 묶어 시세관여율, 자전거래, 통정·가장매매 여부를 파악하는 개인기반 시장감시 체계로 전환을 추진해 왔다.

이는 도이치모터스 사건이 던진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불공정거래의 핵심은 특정 계좌 하나가 아니라 그 계좌를 지배한 사람과 자금의 출처, 주문 권한, 수익 귀속 구조에 있을 수 있다"며 "향후 시장감시는 어느 계좌에서 이상 주문이 나왔는가를 넘어 누가 해당 거래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는가를 추적하는 방향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말했다.

◆ 처벌 강화에도 개미 피해 보상은 숙제

개인투자자 보호 측면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남아 있다. 주가조작 사건은 적발과 처벌이 이뤄지더라도 피해 복구가 쉽지 않다. 작전세력이 주가를 끌어올리는 동안 일반 투자자는 거래량 증가와 주가 상승을 정상적인 시장 신호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후 작전세력이 물량을 처분하고 빠져나가면 손실은 고점에 유입된 개인투자자에게 집중되는 구조다.

피해 산정도 간단하지 않다. 주가조작으로 형성된 인위적 가격과 정상 가격을 구분해야 하고, 투자자 손실 중 얼마가 시세조종 때문인지도 따져야 한다. 기업 펀더멘털 변화, 시장 전체 흐름, 투자자 개별 매매 판단이 뒤섞이는 만큼 실제 손해액을 입증하는 과정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당국이 과징금과 부당이득 환수 장치를 강화하고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위반자 제재와 불법이익 박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반 투자자가 손실을 보전받기 위해서는 별도의 민사소송이나 집단적 대응이 필요할 수 있다. 처벌 수위가 높아져도 피해 보상 체계는 여전히 복잡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편, 김 여사 측이 상고 방침을 밝힌 만큼 대법원 판단은 이번 사건의 최종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항소심 판단이 유지될 경우 향후 불공정거래 수사와 재판에서는 주문 실행자뿐 아니라 자금 제공 경위, 계좌 지배 관계, 수익 귀속 구조가 더 비중 있게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금융당국과 거래소의 개인기반 감시체계가 작전세력의 우회 계좌와 전주 구조를 얼마나 걸러낼지도 남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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