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손원태 기자] 유통은 실생활과 밀접한 산업군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상품이 쏟아져 나와 소비자들의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들 상품을 사용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도 많습니다. 이 코너는 유통 관련 궁금증을 쉽게 풀어드리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유통 지식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국내 소비 심리 위축으로 실적이 오랜 기간 정체된 상황에서 고환율 여파로 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나 물류, 인건비, 포장재 등 제반 비용은 모두 오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원재료 가격이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제품 가격을 낮추라는 것은 적자를 감수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가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를 두고 던진 하소연이다. 최근 식품업계에는 '정부 간담회 이후 가격 인하'라는 새로운 공식이 자리 잡았다. 농림축산식품부 주도로 업계 관계자들이 모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먹거리 가격이 줄줄이 내려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식품업계가 대외적으로는 물가 안정에 동참하고 있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중동 전쟁 여파로 유가와 환율이 널뛰며 경영 불확실성이 극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이달 열린 식품업계 정기주주총회에서도 각 사 대표들은 지난해 극심한 소비 부진과 통제 불가능한 비용 상승을 실적 악화의 주요인으로 꼽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 투자 확대와 수익성 중심의 사업 체질 개선을 공통으로 내세웠다.
실제로 대다수 식품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은 5%를 밑돌고 있다. 지난해에는 내수 침체로 매출이 역성장하는 상황마저 직면했다. 일부 기업들은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희망퇴직을 단행한 식품기업만 △롯데웰푸드 △롯데칠성음료 △파리크라상(SPC삼립 지주사) △빙그레 △코카콜라음료(LG생활건강 자회사)로 총 5곳이다.
이들 기업은 지난해 성적표도 참담했다.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SPC삼립(-59.3%), 빙그레(-32.7%), 롯데웰푸드(-30.3%) 순으로 급감했다. 코카콜라음료(-15.5%)와 롯데칠성음료(-9.6%)도 두 자릿수 안팎의 하락세를 나타냈다. SPC삼립(-1.7%)과 코카콜라음료(-2.9%), 롯데칠성음료(-1.3%)는 지난해 매출마저 뒷걸음질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는 지난 2월 농식품부 차관을 팀장으로 재정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7개 관계 부처가 참여하는 '민생물가 특별관리 TF 유통구조 점검팀'을 출범시켰다. 업계 전반에 퍼진 가격 상승 요인과 기업 불공정 행위 등을 찾아내 물가를 안정화하는 것이 목표다.
문제는 이 기조가 식품업계엔 가격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실적이 악화한 상황에서 수익성 제고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정부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가격을 내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농식품부 주도 TF 간담회는 출범 한 달여 기간 동안 총 세 차례 회의가 열렸다. 그 사이 공정위는 설탕·밀가루·전분당 업체들의 가격 담합 행위를 적발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제당·제분 업체들의 담합 관련 매출 규모만 최대 15조원(설탕 3조2000억원·밀가루 5조8000억원·전분당 6조2000억원)에 육박한다. 과징금 액수도 관련 법상 최대 20%까지 부과할 수 있어 수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공정위 조사가 시작되자 제당·제분 업계는 식품 원재료 평균 가격을 줄줄이 낮췄다. 설탕은 4~6%, 밀가루는 5~6%, 전분당은 3~5% 수준으로 출고가를 내린 것이다. 이 조사는 소비자들의 공분을 불렀고,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도 힘을 실었다.
정부는 식품 원료 가격이 내려간 만큼, 먹거리 물가에도 반영이 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2월 24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제6회 국무회의에서 "설탕값은 내렸는데 설탕을 쓰는 상품 가격은 그대로 유지해서 소비자들이 혜택을 못 보게 하면 안 된다"고 질타했다.
이후 농식품부 주재로 간담회가 열리면, 그 즉시 식품 가격이 내려가는 구조가 형성됐다. 2차 간담회로 식용유 6개 업체가 평균 3~6%를, 라면 4개 업체가 평균 4.6~14.6% 수준으로 제품 출고가를 인하했다. 3차 간담회에서는 제과 3개 업체가 평균 2.9~5.6%를, 빙과 2개 업체가 평균 8.2~13.4%를, 양산빵 2개 업체가 평균 5.4~6.0% 정도로 가격을 낮췄다. 조정된 가격은 오는 4월부터 순차적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완제품 식품 기업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들 역시 비싼 값에 원료를 사 온 피해자일 수 있어서다. 해외 사업을 넓히려 해도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발목을 잡고, 내수 의존도가 높을수록 정부 기조와 여론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 같은 분위기에 식품업계는 실적 악화를 무릅쓰고, 가격을 내리면서 최대한 버티기에 들어갔다. 제품을 생산하는 데 원가가 차지하는 비중도 높지만, 이상기후로 글로벌 곡물 수급이 불안정해진 점과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 점도 경영에 부담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설탕·밀가루·전분당 등 담합 사건을 정조준하며, 소비자들도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크게 호응하고 있다"며 "식품업 특성상 기간산업도 아니고 개별 기업 매출도 낮아 여론을 거스를 수도 없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도 담합 적발을 통한 질서 확립에는 공감하면서도, 이것이 인위적 가격 압박으로 흐르는 것엔 우려를 표한다. 자칫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침해해 기업의 투자 의욕이나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수요와 공급으로 기업에서 가격이 결정되어야 한다"면서 "정부가 압박을 가할수록 눌린 가격은 다시 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업들의 담합 행위는 분명 문제이고 엄단해야 하지만, 현재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어 원가 상승분이 가격에 반영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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