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이중삼 기자]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나아진다'는 믿음이 깨지고 있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아니라 부모의 자산·첫 주택 보유 여부가 삶의 궤적을 갈랐다는 분석이 나왔다. 출발선에서 벌어진 차이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앞으로 계층 간 불평등은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0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자산 격차 요인 분석과 정책 과제'에 따르면 한국의 자산 불평등은 부동산과 세대 간 이전을 축으로 구조화하는 흐름을 보였다. 상위 10% 고자산가의 자산 점유율은 1995년 이후 65% 안팎을 유지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로 분류되는 덴마크, 인접국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소득 증가를 통해 자산 격차를 만회하는 통로가 제한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자산 불평등의 구조화 흐름은 특히 청년 세대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연구원이 2007년 이들의 자산 상태를 2023년까지 추적한 결과 상속·증여를 받았거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부동산을 취득한 집단은 이후 자산 축적 과정에서도 우위를 이어갔다. 반면 사회생활 초기 생계비 부담과 부채를 안고 출발한 집단은 자산 하위 분위에 머무는 경향이 뚜렷했다. 초기 자산 격차가 장기적 자산 분포를 결정하는 경로 의존성이 확인된 셈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한국금융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분가 초기 기혼 청년가구의 순자산 분포 연구'에 따르면 기혼 청년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분가 시점 9876만원에서 5년 뒤 1억7447만원으로 증가했다. 총자산은 1억3976만원에서 2억3852만원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부동산 자산은 1억1858만원에서 2억679만원으로 확대됐다. 자산 증가분 상당 부분이 주택 가격 상승에서 발생했다는 의미다. 자가를 보유한 가구는 가격 상승 효과를 고스란히 누렸지만 무주택 가구는 높은 주거비 부담 속에 자산 축적 여건이 제한됐다.
◆ "자산은 주거 등 삶의 질 전반에 영향"
여기에 부모 세대의 자산이 청년 세대의 자산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모의 교육 수준과 소득·자산 등 사회경제적 지위가 세대 간 유사성을 보이며 대물림돼 자녀 세대의 자산 축적에 차이를 유발한다"며 "상대적으로 많은 자산을 축적한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고 증여가 늘면 격차는 더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부모의 순자산이 기혼 청년가구의 5년 후 순자산에 유의미한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부동산이 자산 격차의 핵심 고리로 자리 잡으면서 사회 전반의 균열도 깊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SNS에서 "부동산이 나라의 부를 편중시키며 무주택 서민과 청년의 희망을 빼앗고 있다"며 "주택 문제가 결혼과 출산 포기의 주요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자산 구조의 왜곡이 저출생 문제와도 맞물린다는 진단으로 풀이된다.
과거에는 교육과 취업을 통한 소득 상승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최근 주택 가격 상승 속도를 고려하면 근로소득만으로 자산 격차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은 "자산 격차는 세대 간 기회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며 "자산은 단순한 경제적 지표를 넘어 가계의 위기 대응 능력과 주거·교육 등 삶의 질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고령화와 저출산 흐름 속에서 자산 집중은 세대 간 이전을 통해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해법으로 생애주기별로 연계된 종합 정책과 중저자산층의 자산 형성 지원을 제안했다. 자산 격차가 세대 간 기회 불평등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제도적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연구원 관계자는 "사적 상속·증여 일부를 사회적 상속 체계로 전환하고 저소득층 맞춤형 금융 역량 강화·지역균형발전·누진적 자산 과세 등 정책 수단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