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게 약이다] 기록 뒤에 숨은 그림자…올림픽과 함께 진화한 '도핑의 역사'


반복된 도핑 스캔들…고대의 환각제에서 혈액·기계 도핑까지 진화
세계반도핑기구 출범…이후에도 계속되는 약물과의 전쟁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산 시로 스타디움에서 개막식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뉴시스

아플 땐 약을 먹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는 영양제를 먹습니다. 이제는 약국뿐만 아니라 편의점이나 온라인 등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겐 익숙한 약과 영양제들은 각자의 역사와 속사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코너는 유명한 약·영양제의 개발과정이나 히스토리를 조명합니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조성은 기자]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환호와 함께 따라붙는 단어가 있다. '도핑'이다. 지난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피겨스케이팅 선수 카밀라 발리예바가 금지 약물 트리메타지딘 양성 반응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법적 공방 끝에 징계가 확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국가 차원의 조직적 도핑이 드러났다. 러시아 반도핑연구소장이던 그리고리 로첸코프의 폭로로 소변 샘플을 바꿔치기한 정황까지 공개됐다. 올림픽은 인간 한계의 무대이지만, 동시에 약물과의 싸움이 반복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도핑'의 어원은 아프리카 줄루족 전사들이 전투 전 마시던 알코올 음료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승리를 위해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스포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선수들은 환각 성분이 있는 식품이나 테스토스테론이 들어 있는 양의 고환을 섭취하며 근력 강화를 기대했다. 근대 스포츠에서도 약물은 낯설지 않았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토머스 힉스는 경기 도중 스트리크닌과 브랜디를 투여받았다. 당시엔 이를 문제 삼는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1930년대 테스토스테론 합성이 가능해지면서 단백동화(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등장했다. 1950~60년대 냉전 시기 소련과 동독은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약물을 사용했다. 당시 약물을 투여한 여성 선수들은 무월경, 심혈관 질환, 기형아 출산, 정신적 후유증 등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동독의 여자 투포환 선수 안드레아스 크리거는 10대 시절부터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았고, 심각한 부작용과 성정체성 혼란 끝에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덴마크 사이클 선수 크누드 엔마르크 옌센이 경기 중 쓰러져 사망하면서 도핑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각성제 복용 의혹이 제기되며 국제사회는 처음으로 선수 안전 문제를 직시했다. 1968년 그르노블 동계올림픽부터 도핑 검사가 도입됐지만, 검출 기술은 미비했다.

그러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캐나다 단거리 선수 벤 존슨이 스타노졸롤 양성 반응으로 금메달을 박탈 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의 몰락은 반도핑 체계 강화의 계기가 됐다. 같은 대회에서 육상 3관왕에 오른 여성 선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역시 약물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맞서 1999년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출범했다. WADA가 지정한 금지 약물은 250여개 성분, 4만 종 이상의 의약품이다. 테스토스테론·스타노졸롤 같은 동화작용제는 근육 성장과 회복을 촉진한다. 에리트로포이에틴(EPO)은 적혈구 생성을 늘려 지구력을 높이지만 혈액 점도를 높여 심근경색과 뇌졸중 위험을 키운다. 성장호르몬은 조직 재생을 돕지만 대사 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인슐린은 체지방 감소와 근육 보존 효과 때문에 오남용되고, 베타-2 작용제(살부타몰 등)는 기관지를 확장해 지구력을 높인다. 고혈압, 간 기능 손상, 불임, 정신 이상은 반복적으로 보고된 부작용이다.

그럼에도 도핑은 사라지지 않았다. 검출 기술이 발달할수록 도핑 기술도 함께 발달했다. 도핑은 올림픽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은 에리트로포이에틴(EPO)·혈액 도핑·테스토스테론 등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사실을 자백하며 투르 드 프랑스 7연패 기록을 잃었다. 그는 수년간 150차례의 검사에도 적발되지 않았는데, 도핑이 개인의 일탈을 넘어 전문가 집단과 '코디네이터'가 개입하는 조직적 범죄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약물을 쓰지 않는 도핑도 있다. '혈액 도핑'은 미리 채혈한 혈액에서 적혈구를 추출해 재주입하는 방식이다. 산소 운반 능력이 증가해 장거리 종목에 유리하지만, 혈전과 심장마비 위험이 따른다. 사이클 등 기계에 소형의 배터리를 장착하는 등의 '기계 도핑'도 이뤄진다.

WADA는 경기 중·외 검사를 병행한다. 소변은 특수 제작된 병에 보관되며, 일부 샘플은 10년간 냉동 보관 후 재검사된다. 과거에 적발하지 못한 약물을 기술 발전으로 찾아내기 위해서다. 선수 생체여권 제도를 통해 장기적인 혈액 수치 변화를 추적하는 방식도 활용된다.

도핑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체제 경쟁과 과학 발전의 그림자 속에서 진화해왔다. 근육을 키우는 스테로이드, 지구력을 높이는 EPO, 대사를 조절하는 인슐린과 베타-2 작용제, 성장호르몬 등 약물의 스펙트럼은 넓어졌다. 그러나 반복되는 부작용과 기록 박탈 사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승리를 향한 욕망이 과학을 앞설 때, 스포츠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가장 깊은 그림자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말한 올림픽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

p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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