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IBK기업은행 노사가 누적 보상휴가와 '총인건비제'를 둘러싸고 정면충돌하고 있다. 노조는 미사용 보상휴가가 44만일, 금액으로는 약 780억원에 달한다며 사실상 임금체불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까지 "법을 어기게 만든 제도"라며 문제를 지적했지만, 정부·금융위·기업은행 노사가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으면서 갈등은 더 커지는 분위기다.
30일 노조와 금융권에 따르면 기업은행은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돼 기획재정부가 정한 '총인건비제' 적용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3급은 월 11시간, 4급 이하는 13시간까지만 시간외수당을 현금으로 지급하고, 이를 초과한 근무는 전부 보상휴가로 전환한다.
문제는 이 보상휴가를 현실적으로 소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노조 집계 기준 지난해 기준 사용하지 못하고 쌓여 있는 보상휴가는 직원 1인당 약 35일, 전체로는 44만2965일 수준이다. 이를 수당으로 환산하면 1인당 약 600만원, 전체 규모는 약 78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노조는 추산한다.
노조는 "실제로는 초과근로를 했는데도 총인건비 한도에 묶여 제때 임금을 받지 못하고, 대신 쓰지도 못하는 휴가만 쌓이고 있다"며 "총인건비제가 공공기관 노동자의 임금·휴식권을 제약하는 구조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 이 대통령 "임금체불 말 많다"…총인건비제 직격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9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기업은행 사례를 직접 언급하며 "임금체불 때문에 말이 많다"며 "총인건비를 정해 놓으면 돈이 있어도 지급하지 못하는 공공기관이 있는데, 법률을 위반하면서 운영하도록 정부가 강요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책실에서 이 사안을 챙겨보라"며 문제 해결을 주문했다.
사실상 총인건비제가 현실의 노동관계법·근로기준법과 충돌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노조는 이를 두고 "대통령 지시 사항"이라며 금융위와 기재부가 더 이상 책임을 미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총인건비제는 공공기관 예산의 방만 운용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올해 기준 공기업·준정부·기타공공기관 등 331개 기관이 적용 대상이다. 기업은행은 이 틀 안에서 인건비 총량을 관리해야 하다 보니 시중은행과 유사한 영업·성과를 내면서도 급여 수준과 성과급 구조는 뒤처져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실제로 기업은행 직원 평균 연봉은 약 8500만원으로 4대 시중은행 평균(약 1억1600만원)보다 30%가량 낮은 것으로 집계된다.
◆ 노조, 금융위 앞 천막 농성 이어 총파업 결의대회
노조는 이미 총파업 수순에 돌입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기업은행지부는 지난 23일 조합원 총투표에서 단독 총파업안을 찬성률 91%로 가결한 데 이어, 24일부터 금융위원회 앞에 천막을 치고 철야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어 지난 29일에는 서울 중구 기업은행 본점 앞 대로에서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었다. 결의대회에는 한국노총과 금융노조 지도부, 야당 의원 등이 함께 참석해 금융위와 정부를 규탄했다. 류장희 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대통령 업무보고로 우리의 투쟁은 새로운 기회를 맞았지만, 그 뒤에서 기재부와 금융위의 기득권이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며 "금융위가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내년 1월 중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노조는 금융위가 총인건비제의 예외 적용이나 제도 개선 방안을 제시해, 미사용 보상휴가를 현금 수당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내년도 예산을 심의하는 '경영예산심의회(경예심)' 과정에서 노조 요구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며 금융위를 OECD 다국적기업 책임경영(RBC) 가이드라인 위반 혐의로 한국 연락사무소(NCP)에 제소하기도 했다.
◆ "총인건비 예외 어렵다"는 경영진…공공기관 전체로 번지는 논쟁
김성태 기업은행장은 대통령 업무보고 당시 "자구노력에 더해 정부 협의가 필요하다"며 "시간외 업무를 줄이는 방향은 효과가 크지 않고, 총액한도 예외 방안은 전체 공공기관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총인건비제를 기업은행만 예외적으로 풀어줄 경우 다른 공공기관과의 형평성 논란이 커질 수 있다는 취지다.
기재부와 금융위 역시 총인건비제의 전면 재검토에는 신중한 기류다. 기업은행의 보상휴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공공기관 인건비 관리 틀 자체가 흔들릴 수 있고, 다른 기관 노조의 유사 요구를 촉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노조와 노동계는 "현재 구조가 사실상 초과근로 임금의 집행을 가로막는 만큼, 기업은행을 시작으로 총인건비제의 근본적 손질이 필요하다"고 맞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시각은 엇갈린다. 총인건비제가 도입 목적대로 공공기관의 인건비 과다 지출을 막는 장치라는 점은 인정되지만, 기업은행처럼 민간 시중은행과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관에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게 타당한지에 대한 논쟁이 커지고 있다.
노조는 "총인건비제를 이유로 미사용 보상휴가 정산을 미루는 건 구조화된 임금체불"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정부와 경영진은 "제도 개선의 방향이 공공기관 전체와 연동된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 지시 이후에도 금융위가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노조는 총파업 카드를 꺼내든 상황에서 기업은행은 총인건비제 개편을 둘러싼 '시험대' 한가운데 서게 됐다.
이번 논쟁이 기업은행의 보상휴가·임금 문제를 넘어 공공기관 인건비 규율 전반을 손보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또 한 번 정치·노사 갈등만 키운 채 봉합될지에 따라 총인건비제를 둘러싼 향후 논의의 방향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노사 합의는 계속 진행 중이며 합의점 도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은행에만 총인건비 예외를 허용하면 다른 공공 금융기관과의 형평성 논란이 불가피하고, 그대로 두자니 임금체불·노사갈등 이슈가 계속 터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정부와 금융위가 단기 땜질이 아니라, 정책금융기관에 맞는 별도 인건비·성과 프레임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큰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