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땐 약을 먹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는 영양제를 먹습니다. 이제는 약국뿐만 아니라 편의점이나 온라인 등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겐 익숙한 약과 영양제들은 각자의 역사와 속사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코너는 유명한 약·영양제의 개발과정이나 히스토리를 조명합니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조성은 기자] '마법의 푸른약',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비아그라는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약 중 하나일 것이다.
비아그라는 세계 최초의 먹는 발기부전 치료제다. 유명한 약들이 그렇듯 비아그라도 '부작용'에서 시작한 약이다. 1991년 화이자 연구진은 협심증 치료를 위해 '실데나필 시트레이트'라는 물질을 개발했다. 심장혈관을 확장시켜 혈류를 원활하게 해주는 물질이었는데 임상시험에서 치료 효과는 미미했다. 프로젝트는 곧 폐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남성 피험자들이 약을 돌려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특정 부위의 혈류가 좋아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연구진은 약효의 방향을 바꿔 실험을 다시 진행했다. 실데나필은 남성이 성적으로 흥분할 때 만들어지는 사이클릭GMP(cGMP) 분비를 돕고 발기를 저해하는 포스포디에스테라아제(PDE5)를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게 1998년 3월27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을 받아 세계 최초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출시됐다. 제품명은 비아그라. '활력'(Vigor)과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를 결합한 말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상징했다. 알약의 색도 신뢰감과 안정감을 주는 파란색으로 정해졌다.
비아그라는 출시 1년 만에 전 세계 매출 10억달러를 돌파하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특허가 만료돼 제네릭(복제약)들이 쏟아지기 전까지 매년 10억~20억달러의 매출을 화이자에 안겨줬다. 더욱이 비아그라는 제조단가가 낮아 영업이익률이 높았다. 중견 제약사였던 화이자는 비아그라 하나로 글로벌 제약사 반열에 오르게 됐다.
사회적으로도 비아그라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비아그라 이전엔 발기부전은 '무력증'이라 불렸다.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질병이자 하나의 낙인이었다. 비아그라 이후 의학계는 '발기부전'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또 '성능 향상제'로 인식되면서 건강한 남성의 오남용 문제도 떠올랐다. 심리적 의존과 불법 판매, 위조약 등의 사회적 논란도 이어졌다.
비아그라의 마케팅 전략도 파격적이었다. 미국 상원의원 출신의 전쟁영웅인 밥 돌을 모델로 기용한 것이다. 돌은 당시 전립선 암 수술 이후 발기부전을 겪고 있었고 비아그라를 통해 회복됐다고 전해진다. 돌은 자신이 비아그라 사용자임을 공개하며 "치료받는 건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남성들이 병원을 찾고, '노년의 성'을 공론장으로 이끌어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후 돌은 비아그라의 한국 시판을 앞두고 방한해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비아그라의 성공으로 발기부전 치료제는 제약사들의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2003년 일라이릴리는 지속시간이 긴 '시알리스'를, 2004년 바이엘은 '레비트라'를 내놨다. 2012년, 비아그라의 한국 특허가 만료되자 본격적인 제네릭 경쟁이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한미약품의 '팔팔정'과 '구구정', 종근당의 '센돔' 등이 출시됐다. 이제는 제네릭 중심의 시장이 됐지만 '비아그라'가 가진 상징성은 여전하다.
2020년대 들어서는 비아그라의 성분인 실데나필이 세포 노화 억제 효과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비아그라가 수명 연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항노화 후보물질로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비아그라는 '남성의 약'을 넘어 인류 노화 연구의 단서로 확장됐다.
업계 관계자는 "비아그라는 단지 남성의 신체 기능을 복원한 약이 아니라 노화, 자존감, 성적 욕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꾼 약"이라며 "의료가 치료를 넘어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