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이재명 대통령의 '주택담보대출 이자놀이' 경고 이후 은행권이 생산적 금융 기조로 빠르게 기수를 돌리고 있다. 정부는 50조원 첨단전략산업기금과 이를 마중물로 한 100조원 '국민성장펀드' 구상을 확정했고, 내년 상반기부터는 중소기업 상생금융지수 도입도 예고됐다. 은행들은 중소기업 현장방문 확대·모험자본 연계 등 움직임을 서두르지만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이 9년 만에 최고라는 경고등과 '관치' 논란은 여전하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7월 24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손쉬운 주담대 같은 이자놀이가 아니라 투자 확대에 나서달라"고 주문했고, 금융당국은 곧바로 은행연합회,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여신금융협회, 금융투자협회 등 업권 협회장들을 불러 투자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정책·감독 라인이 일제히 같은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생산적 금융은 피할 수 없는 은행권 아젠다로 자리 잡았다.
정책 설계의 주축은 첨단전략산업기금(50조+)과 국민성장펀드(5년 100조+)다. 금융위는 산은법 개정과 국가보증 동의를 토대로 반도체·AI·이차전지 등 첨단산업 전반을 지분·대출로 지원하는 기금을 신설하고, 민간 금융·연기금 자금을 묶는 국민성장펀드로 대규모 모험자본 공급을 예고했다. 국회 본회의 통과로 법적 기반도 확보됐다.
정부와 여당은 은행의 중소기업 금융을 수치화해 공개하는 상생금융지수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부터 기업·국민·하나·신한·우리·농협은행 등 중소기업 대출 상위 은행에 단계 적용할 방침이다. 평가 항목은 대출 규모·조건 개선·혁신금융 등 실적(60%)과 금리·만기·관계형 금융 등 체감도(40%)로 구성되며, 불건전 영업은 감점 요인으로 반영된다.
이에 하반기 들어 시중은행들은 중소기업 현장방문을 대폭 늘리고, 우량 중기 발굴·밸류체인 금융·비금융(컨설팅) 지원을 결합한 패키지를 확대 중이다.
'생산적 금융 강화' 기조에 맞춘 은행별 현장 조치도 눈에 띈다. KB국민은행은 연초부터 기업금융 유망 거점 15곳에 'SME 전담 지점장'을 배치하고, 지난 26일에는 '중소기업 동반성장 프로젝트'를 내놨다. 혁신·첨단기업 대상 0.5%포인트 금리우대, 주력산업 전용보증, 기술금융 우대가 골자다. 우리은행은 'BIZ프라임센터'를 13곳까지 늘리고 '강북 BIZ어드바이저센터'를 신설해 기업자문 기능을 보강했다. 공급망+금융+정산을 묶은 '원비즈e-MP·SAFE정산' 등 플랫폼 전략도 병행 중이다.
하나은행은 현대차·기아·무역보험공사와 손잡고 자동차 수출 공급망 6300억원 지원에 나섰고, 신한은행은 지난해부터 추진한 총 3067억원 규모의 민생금융지원 가운데 3029억원(98.7%)을 올해 상반기까지 집행하며 소상공인 비용을 낮췄다. NH농협은행은 4조5000억원 소상공인 금융지원,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과 2조6000억원 중기 금융을 병행한다.
그러나 리스크 요인도 뚜렷하다.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의 중기대출 연체율은 올해 2분기 말 기준 0.5%대로, 9년 만에 최고치다. 업종별 부실 압력이 커지고 경기 둔화·수출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자산건전성 부담이 확대되고 있다.
상생금융 확대의 비용도 변수다. 4대 은행의 올해 상생금융 예상 집행액은 5조5000억원대로, 2023년 8960억원, 지난해 2조2860억원에서 2년 새 6배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다. 순익 대비 상생·공헌성 지출 비중이 2023년 7% 수준이었으나 지난해 20%로 올랐고, 올해 34%로 급등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런 흐름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만 은행들에겐 수익·자본관리 딜레마로 남는다.
시장에선 관치 논란도 경계한다. 상생지수가 '중기 대출을 더 내주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경우 건전성 악화 우려가 제기된다. 반대로 평가의 일관성·인센티브 설계가 촘촘하면 '규제 리스크 프리미엄'을 낮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은행 수익구조도 체질 변환이 필요하다. 금리 하향·예대마진 축소, 교육세 인상 등 비용 요인이 겹치는 가운데, 상반기 사상 최대급 순익에도 하반기 순이자마진(NIM) 방어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적 금융을 일시적 비용이 아니라 미래 수익모델과 연결하는 작업이 관건이다. 일례로 공급망·IP·데이터 기반 담보 대체형 여신, 펀드·직접투자와 연계한 하이브리드 금융 등이 있다.
은행권의 생산적 금융 전환은 일회성 부담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향후 국민성장펀드 세부 설계와 상생금융지수 시범 적용이 그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중소기업 연체율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무작정 대출을 늘리라는 신호는 위험할 수 있다"며 "건전성과 정책 목표 사이의 균형이 필요해 보인다. 생산적 금융 확대는 필요하지만, 결국 자산 건전성을 어떻게 지킬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