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지난 1월 전면 도입된 '책무구조도'가 현장에 안착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은행권의 금융사고 금액은 줄어들지 않았다. 5대 시중은행에서 상반기에만 16건, 1790억원의 금융사고가 터지면서 임원 책임을 강화하겠다던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1~6월 KB국민·신한·하나·NH농협·IBK기업은행 등 5대 은행이 공시한 10억원 이상 금융사고는 16건, 1790억392만원이다.
지난 1월 IBK기업은행에선 882억원에 달하는 부당대출이 적발됐고, 2월에는 신한은행과 KB국민은행이 각각 19억9800만원, 22억2140만원의 금융사고를 공시한 바 있다.
4월에는 NH농협은행, 하나은행, KB국민은행에서 연이어 금융사고가 쏟아졌다. NH농협은행에선 204억9310만원의 외부인에 의한 과다대출, 하나은행에선 350억원 규모의 외부인에 의한 사기가 발생했다. 국민은행에선 내부직원의 신용등급 조작 대출(업무상 배임) 21억8902만원을 공시했다.
지난 5월에도 하나은행은 외부인에 의한 사기로 총 63억7441만원 규모의 금융사고 3건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국민은행도 지난달 27일 외부인에 의한 20억원 규모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최근까지도 금융사고는 이어지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18일 47억9000여만원 규모의 금융사고 발생 사실을 공시했다.
올해 들어 시중은행 가운데 하나은행은 금융사고 6건을 신고했고 사고금액은 536억3599만 원으로 가장 많았다. KB국민은행(6건·157억2047만원), NH농협은행(2건·221억5072만원), 신한은행(2건·37억521만원) 등이다. SC제일은행(130억3100만원), 토스뱅크(27억8600만원), 기업은행(약 40억원) 등은 1건을 각각 신고했다. 우리은행은 최근 인도네시아 해외법인에서 1000억원대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은행들의 내부통제 강화 기조에도 이같은 대형 사고가 줄줄이 적발되며 '책임 사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책무구조도가 본격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났으나 은행권에서 금융사고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책무구조도는 대표이사를 비롯한 금융사 임원이 담당하는 직책별로 내부통제 및 위험관리 책무를 배분한 내역을 기재한 문서다. 대표이사 등 임원의 징계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으로 불린다.
금융감독원은 올해부터 모든 은행에 임원·부서별 '책무기술서'와 이를 도식화한 '책무체계도' 제출을 의무화했다. 업무 단위별 최종 책임자를 명시해 사고 발생 시 임원 책임 회피를 막겠다는 취지다. 미비점이 발견되면 문책경고 등 중징계 가능성을 앞세웠지만 실제 사고에는 아직 적용된 사례가 없다.
은행권에선 내부통제 강화를 위한 제도적 노력에도 외부인 사기, 내부 직원 일탈 등이 반복되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입장이다. 올해 공시된 사건 중 상당수는 과거에 발생했던 만큼 책무구조도 적용과는 거리가 있다. 책무구조도는 금융사고 적발 시점이 아닌 발생 시점을 기준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제도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금감원은 반복되는 대출 사고를 막기 위해 지난해 하반기 여신 프로세스 개선 방안을 도입했다. 대출 서류의 진위 여부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외부 감정평가법인을 전산 시스템으로 무작위 지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재명 정부는 앞서 공약집을 통해 금융사고 발생시 책임자를 엄정처벌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은행권의 고질적인 횡령·배임 등에 대해서도 한층 강도 높은 대책이나 규제가 제시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은행권에선 책무구조도 1호 사례가 되는 것을 경계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금감원은 다음달 은행권을 대상으로 대표이사와 준법감시인에 대한 책무구조도 점검에 나설 예정이다. 오는 9월엔 은행, 지주사 CEO를 불러모아 개선을 위한 방안 모색할 계획이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3~4월 시중은행의 책무구조도 운영실태를 현장점검하고 개선 필요사항을 공유한 바 있다. 당시 금감원이 강조한 임원의 6대 관리의무는 △기준의 적정 마련 점검 △기준의 효과적 집행·운영 점검 △임직원 준수여부 점검 △위반·미흡사항 시정·개선 △교육·훈련 지원 △대표이사 앞 보고체계 마련 등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책무구조도를 준비하며 실효성 있는 점검을 위해 임원의 책무와 부서의 내부통제 활동을 구체화했다"며 "준비 과정에서 각 직무 및 직급별 내부통제 항목을 명확히 하고 전산을 구축해 더 세밀한 내부통제와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명확해 짐에 따라 금융 사고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금융사고 예방을 최우선으로 두고 내부통제 제도 정비와 은행권 전반의 조직 문화 및 직원 의식 개선이 이뤄지고 있어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며 "은행권은 실효성 강화를 위한 내부통제 체계 개선과 현재 AI 및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예방 중심의 내부통제 체계를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