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성락 기자] 재계가 '상법 개정'을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내용을 다룬 정책 토론회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렸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국회에서 이재명 대표를 좌장으로 하는 '행복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상법 개정 어떻게 할 것인가' 정책 토론회를 진행했다. 토론회에는 상법 개정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여러 기업인과 경제단체 관계자, 학계 인사 등이 참석했다.
민주당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게 골자다.
◆ 기업 경영을 법원에 맡기게 되는 셈
이날 토론회에서는 주주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면 주주가 이사에게 직접 책임을 묻는 등 손해배상 청구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현행 주주 대표 소송은 회사의 손해 전제로 이사의 손해배상액이 회사에 귀속되지만,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및 주주 이익 보호 의무가 신설되면 주주가 이사에 직접 상법 제410조에 따른 제3자 책임 또는 민법 제750조의 불법 행위 책임을 추궁할 가능성이 크다.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상법이 개정되면 관련 판례가 정립될 때까지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고, 결국 기업 경영을 법원에 맡기게 될 것"이라며 "'판사님을 회장님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상법 개정은 배임 고소·고발을 증가시킬 우려가 있다는 게 재계 의견이다. 현 배임죄 기준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상법 개정 시 이사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여겨져 배임 고소·고발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 미래 위한 투자 어려워진다
현재 기업들은 이사회·주주총회 등의 승인을 거쳐 인수합병(M&A)이나 신규 투자 등을 결정한다. 특히 최근 기업의 M&A 건수와 금액이 줄어드는 추세에서 상법 개정은 더욱 M&A·신규 투자 등 미래를 위한 의사 결정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걱정이다. 기업 입장에서 단기 차익·배당을 원하는 주주 요구에 따라 안정적인 경영에만 몰두할 가능성이 있다.
정우용 한국상장사협의회 부회장은 "기본법인 상법에 이사 충실의무를 들여오면 신사업과 투자 결정이 어려워진다. 상법이 개정되면 이사가 모든 상황에 대해 책임져야 할 부작용이 크다"며 "이사는 퇴임 이후에도 10년간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 새로운 결정을 내리기 더 꺼릴 가능성이 커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욱 현대자동차 부사장도 "당장 이익을 빌미로 법적 책임을 물으면, 이사회의 장기 사업 의사 결정은 어려워진다"며 "투자 지연, 단기 수익 요구 수용으로 기업 가치가 하락하면 주가에도 부정적이다. 전체 주주 손해를 넘어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 행동주의펀드의 주주 피해 유발
재계는 상법 개정 시 이사의 책임이 가중돼 비상장사의 상장 기피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상장이 줄어들면 자본 시장의 활력 또한 더욱 저하될 전망이다.
아울러 재계는 상법 개정 시 해외 투기 자본 등의 국내 기업 경영권 공격이 거세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의 주주 이익 보호 의무는 경영권 분쟁 등으로 단기 주가 부양 후 차익을 실현하는 행동주의펀드에는 이익이 될 수 있으나, 소액주주에는 장기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김동욱 부사장은 "행동주의펀드 영향력 확장에 더해 상법을 개정하면 기업 경영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다. 2019년 행동주의펀드인 엘리엇이 현대차를 공격했을 때 주당 2만2000원, 총 5조8000억원의 배당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며 "현대차의 가치와 비전을 믿어준 주주 덕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주주 충실의무가 있었다면 각종 법적 분쟁 대응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중견·중소기업 피해 더 크다
재계가 강한 어조로 상법 개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내는 것은 대기업 대비 소송 및 주주 대응 등에 더 취약한 중견·중소기업들의 피해가 막심할 것으로 예상돼서다. 우리나라 기업 중 중견·중소기업 비중은 99%다. 중견·중소 상장사 약 40%는 현행법 체계에서도 주가 부양, 배당 확대, 구조 개편 등의 요구로 최근 3년간 주주와 분쟁 경험이 있고, 상법 개정 시 대부분의 기업이 사법 리스크 확대를 예상하고 있다.
박일준 상근부회장은 "자본시장법은 2500개 회사에 적용되지만, 상법은 100만개 이상 되는 비상장 기업까지 적용되면서 대기업은 물론 중견·중소기업들도 어려움을 호소한다"며 "상장 중소기업은 자본금과 시총이 작아 100~200억 정도면 경영권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괜히 상장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 "급격한 법 개정보단 점진적 개선 바람직"
재계는 실효성 높은 자본시장법 개별 규정 개정을 요구 중이다. 또 경영 판단 원칙을 법제화하고, 모호한 배임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밖에 과도한 행동주의 견제를 위한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 상속 세제 개선, 지배구조 외 제도 정비 등도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상장 기업만 해당되는 자본시장법 개정이나 핀셋 규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박일준 상근부회장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법 개정보다는 문제가 된 합병 분할 사례에 대한 핀포인트 접근이 실용적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밝혔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은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은 기술력, 글로벌 경쟁력 등 기업의 본원적 경쟁력에 의해 결정된다"며 "일반 주주를 보호하면서 밸류업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맞추는 접근이 필요하며, 급격한 법 개정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rocky@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