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장병문·이성락 기자]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SK텔레콤(SKT) 연구소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이 연구소의 문은 평소 굳게 닫혀 있었지만 이날은 소규모 행사가 예정돼 있어 모처럼 개방된 풍경이다. SKT 연구소 앞 차 한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길로 수억원대 최고급 차량이 줄지어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중년 여성들은 SKT 연구소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의 의전을 받으며 내부로 들어갔다. 한 참석자의 손에는 선물용으로 추정되는 와인이 들려있었다.
해당 SKT 연구소는 사업장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센터 측이 회사와 관계없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 문제는 아무런 비용 지불 없이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이곳을 찾은 이들도 SKT 직원이 아니라 노 관장의 지인과 관계자들이다. '재벌가 사모님들의 사교 모임'으로 알려진 '미래회' 회원들의 비공개 만찬이 열렸다.
노 관장과 주변인들은 장충동 SKT 연구소를 '타작마당'이라 칭하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 타작마당은 개인이 회사 자산을 사실상 사유화한 부조리 사례로 꼽히고 있다. SKT 직원들 사이에서는 '연구소가 장충살롱이 돼버렸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노 관장 측은 "타작마당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다만 집주인인 SKT 측에 알리지 않고 타작마당에서 미래회 모임을 여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 '악플 부대' 김흥남·'6공 황태자의 딸' 박지영 등 핵심 멤버 참석
이날 타작마당에서는 미래회 주도로 'AGl(일반 인공지능) 시대와 인간의 미래' 저자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부 맹성현 명예교수의 강의와 미래회 회원들의 식사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 미래회 관계자는 "요즘 AI에 대한 관심이 많다 보니 좋은 의미로 강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회사 건물을 재벌가 사모님들이 모여 친분·교양을 쌓는 취미 공간이나 사교장으로 활용하는 것을 '좋은 의미'로 포장하는 것은 이들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날 강의·식사 자리에는 노 관장을 포함해 15명 가량이 참석한 것으로 파악된다. <더팩트> 취재진 확인 결과 대부분 미래회 회원이었다.
그간 미래회 회원 명단이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지만, 핵심적으로 거론된 인물들의 모습은 모두 볼 수 있었다. 김흥남 전 미래회 회장이 대표적이다. 김 전 회장은 지난 2019년 악성댓글(악플) 부대를 만들어 노 관장과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을 향한 악플을 조직적으로 달아 뭇매를 맞았다. 그는 결국 허위사실 유포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벌금 1억원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 '6공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딸인 박지영 씨도 모임 시간(오후 5시)에 맞춰 모습을 나타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독립 법인 스포츠윤리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씨는 현 미래회의 실질적인 회장 역할을 맡고 있다. 박씨가 탄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G바겐) 차량이 연구소에 도착하자 타작마당 내부에 있던 직원이 뛰쳐나와 발레파킹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박씨의 남편인 이상원 변호사도 법조계와 재계에서 유명 인사다. 이 변호사는 노 관장의 법률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이혼재판 과정에서 언론 대응을 도맡았다. 악플 부대 논란이 불거진 당시에는 김 전 회장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현재 이 변호사는 이혼 재판 취재진에게 "최 회장이 김 이사장에게 쓴 돈이 1000억원이 넘는다"고 말하는 등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된 상태다.
이밖에도 재력가의 여성들이 이날 미래회 모임에 참석했다. 패션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인플루언서 P 씨도 함께했다. 현장에서 자신을 미래회 회장이라고 소개한 A 씨는 "참석자 명단을 알려줄 수 없다. 미래회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강의를 듣는다"고 설명했다.
◆ 장충동 SKT 연구소, 어쩌다 노소영 '사교장' 됐나
SKT는 지난 2012년 해당 연구소를 개소했다. 경영경제연구소의 UX·HCI 연구 성과 창출 활용,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킹 등을 위해 장충동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 과정을 거쳤다. 연구소가 타작마당이 되기 전에 불린 정식 명칭은 'SK Telecom UX·HCI LAB'으로, 건물 대지면적은 1157.02m²(350평), 시가는 100억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노 관장이 SKT 연구소를 미래회 사교 모임 장소로 언제부터 활용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재계는 노 관장이 연구소를 완전히 장악한 2016년부터로 예상하고 있다.
노 관장은 연구소 오픈 직후 "한국의 스티브잡스를 배출하겠다"는 포부와 통섭형 인재를 매년 5명씩 선정해 1인당 5000만원씩 지원하겠다는 인재 육성 방안 등을 앞세워 연구소의 한자리를 꿰찼고, 점차 영향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연구소와 아트센터 나비의 디지털아트 관련 공동 연구가 진행된 2013~15년에는 SKT, 아트센터 나비 인력이 50대 50 비율이었으나, 2016년부터 SKT 직원이 1명으로 축소됐고 지난해 6월쯤부터 노 관장 측 사람들로 완전히 채워져 연구소가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는지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 복수 관계자의 설명이다.
시점상 노 관장이 이혼 소송 본격화 이후 SKT 직원을 모두 타작마당에서 내쫓았다는 게 재계 안팎의 해석이다. 일각에서는 노 관장이 타작마당에서 미래회 회원들과 이혼 소송 등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전략을 짤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이 다수 존재하는 것은 연구소가 노 관장의 개인 모임 장소, 특히 '인재 양성'이라는 당초 타작마당 운영 목적에서 벗어난 형태로 지속 활용되고 있는 현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평가다.
타작마당에서 미래회 모임만 열린 것은 아니다. 연구소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노 관장이 이사로 있는 태평양시대위원회의 인문학 포럼이 매월 이곳에서 열렸다. 또 노 관장의 동생인 노재헌 변호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센터의 행사가 타작마당에서 자주 열렸다. 재계 관계자는 "노 관장이 회사 건물을 비용 지불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SKT 일터 되찾을 수 있을까…배임 우려 지속
연구소가 사실상 노 관장의 개인 공간으로 변한 점에 대해 SKT 내부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트센터 측에 몇 차례 내용 증명을 보냈으나 어떠한 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는 SKT 직원의 연구소 출입 자체가 완전히 봉쇄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두겁석 담장 일부가 무너져 안전 검사를 실시, 보수가 필요하다는 감리업체의 조언에 따라 SKT 측이 공사를 결정했으나 노 관장 측이 공사에 동의할 수 없다며 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갔다는 전언이다.
SKT는 노 관장이 연구소를 무단 점유하는 것이 자칫 배임 논란으로 확산될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회사는 당초 메세나(예술을 통한 사회공헌) 차원에서 별도 대여비를 받거나 구체적인 규정을 담은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비용 지불 없이 연구소 건물을 개인적 용도로 계속 활용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이다.
노 관장의 이전 '무단 점유' 사례를 고려한다면 SKT가 언제쯤 연구소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노 관장은 2019년 9월 SK이노베이션과 임대차 계약이 종료된 지 5년 만에 미술관을 SK서린빌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마저도 돈을 내지 않고 사용하다가 법원이 지난 6월 "퇴거해야 한다"고 판결한 이후에야 가능했다. 또한 노 관장은 2015년부터 광장동 워커힐호텔 내 고급 빌라에서 지내고 있는데, 숙박비를 전혀 내지 않아 무려 10억원 이상 체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빌라의 하루 숙박료는 200만원, 한 달 숙박료는 8000만원으로 노 관장으로부터 숙박비를 받지 않으면 SK네트웍스 경영진 역시 배임을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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