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분야에 ICT와 혁신 기술이 융·복합되면서 기존의 '이동(移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모빌리티 혁신이 곳곳에서 진행 중입니다. 부분적인 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한 차량이 이미 도로를 다니고 있으며, 그 기능은 점점 진화하고 있습니다. 해상에서도 부분적인 자율운항 기술을 탑재한 선박이 세계 곳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하늘에선 UAM(도심항공모빌리티)이 사람들의 이동 수단 중 하나로 사용되는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당장 내년부터 모빌리티에 급진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정부와 관련 기업은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금 모빌리티 혁신은 어디쯤 왔을까요. <더팩트>가 올해 세 번째 혁신 포럼을 앞두고, 그 주제 '모빌리티 혁신'에 대한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허주열 기자]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1987년 국무총리실 산하 산업연구원에 입사해 34년간 정부의 자동차 산업 정책을 입안하고, 법제화하는 데 노력해 왔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과 호서대학교 자동차공학부 교수로서 3년가량 근무했다. 이후 지난해 2월 자동차융합기술원장으로 취임해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현대화 과정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산증인 중 한 명인 셈이다. <더팩트>는 지난달 말 서울 중구 소재 한 카페에서 이 원장을 만나 국내 자동차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원장은 오는 26일 열리는 더팩트 주최 '모빌리티 혁신 시대' 포럼 연사로도 참여한다.
◆'사람'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국내 자동차 산업
먼저 이 원장은 국내 자동차 산업이 지난 40년간 네 번의 변곡점을 거치면서 성장해 왔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 시절'(저금리·저유가·저환율) 성장 기반을 다졌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국내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큰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이때가 가장 큰 격변기였다고 했다.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친환경차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11년 뒤인 2019년 말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특히 최근 발생한 두 차례 글로벌 위기가 국내 자동차 산업 성장에 기회가 됐다는 게 이 원장의 진단이다. 그는 "금융위기 때 미국 GM이 망하고, 크라이슬러가 매각되는 등 미국 자동차 산업계가 큰 위기를 맞았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공급망이 단절된 틈새를 파고들어 국내 자동차 산업이 성장했다"며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공급망 단절이 이뤄졌을 시기에 우리는 빨리 복구해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비결에 대해 이 원장은 "'사람'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 때 선진국들은 공장에 일할 사람들이 출근을 안 했는데, 우리는 했다"며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현대기아차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 산업의 독점이 심화됐다. 현대차는 글로벌 3위 자동차그룹으로 성장했지만, 국내 자동차 산업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균형적인 성장을 하지 못해 생태계 자체가 피폐해지면서 장기적으로 위기 대응력과 성장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이를테면 작금의 전동화, 디지털화 전환에 현대기아차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국내 자동차 산업 전체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잘하면 괜찮겠지만, 못 하면 대안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전동화와 디지털화는 현재 진행 중인 미래 모빌리티 전환의 핵심 두 축이다. 이와 관련 이 원장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시기이지만, 전동화와 디지털화는 변화지 않을 미래차의 방향성"이라며 "두 축 아래에 여러 서브 섹터가 있다. 예컨대 전동화에는 순수 전기차,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수소차 등이 있고, 디지털화에는 커넥티드카, SDV(소프트웨어 중심 차), 자율주행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미래차로의 전환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원장은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미래차의 세부 영역이 다양해서 그만큼 다양한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며 "우리는 관련 전문가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자동차 산업 연구개발 인력은 2020년 기준 한국은 3만7132명의 연구원을 고용했는데, 같은 해 미국은 11만명, 독일은 13만9000명을 고용했다. 정부가 다양한 대학의 전문인력 양성을 지원하고 있지만, 현장과의 괴리는 여전한 상황이다. 특히 자동차 부품 업체들은 정보, 사람, 돈이 모두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원장은 "미국은 전기차 등 친환경차 인력이 37만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 자동차 업계 인력을 합쳐도 37만명이 안 된다. 또 미국의 소프트웨어 인력은 150만명인데, 우리는 20만명이다. 특히 차량용 소프트웨어 인력은 1000명도 안 된다"고 부연했다.
자동차 부품 업계는 인력난이 더 심각하다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자동차 분야 외감(외부회계감사) 기업이 1430개쯤 되는데, 이들이 전체 매출액의 85%를 차지한다. 나머지 매출 15%는 1만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담당하고 있다"며 "최근 조사에서 전동화 부품을 생산하는 곳이 전체 부품 업체의 8%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게 정부 목표지만, 인력이 부족한 데다 부품 업체들의 R&D 비용은 최근 3년간 계속 줄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산업 패러다임 전환기에 가장 필요한 두 가지는 '돈과 사람'"이라며 "중국은 둘 다 확보했기 때문에 최근 모빌리티 전환의 주도권을 잡았고, 둘 다 밀리는 우리가 역전당한 것"이라고 했다.
◆"전기차 캐즘 시기 구조조정 이뤄질 것"
연장선에서 그는 작금의 전기차 캐즘을 쉬어가는 시기가 아니라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시기로 봤다. 이 원장은 "전기차 캐즘기 구조조정이 이뤄진 후 살아남은 기업을 중심으로 성장이 다시 이뤄질 것"이라며 "이때부터는 '원가 경쟁'이라는 새로운 경쟁이 펼쳐질 것"이라고 고비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원장은 현대차가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자율주행과 AAM(미래항공모빌리티)은 근시일 내 상용화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그는 "완전 자율주행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며 "레벨 4(고도화된 자율주행)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운전자가 없어도 되는 완전 자율주행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율주행차와 비자율주행차가 같이 다니면서 생기는) 기술적인 문제도 있고, 사고 시 법적인 책임 소재 등 복잡한 문제가 단기간 내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원장은 AAM에 대해선 "현대차는 2028년 상용화를 이야기하는데, 관련 연구를 시작한 기간(2018년 이후)이 짧고, 우리는 남북 대치도 있어서 항공 권역이 촘촘해 AAM이 하늘을 마음대로 누비기도 어렵다"며 국토교통부가 예고한 내년, 현대차가 예고한 2028년까지 상용화가 쉽지 않을 것으로 했다.
끝으로 이 원장은 "모빌리티 전환기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인데, 현대차를 제외한 완성차 업체들과 부품 업체들은 양적·질적으로 다 부족한 상황"이라며 "연구개발직과 생산직의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정부의 R&D 지원금도 더 늘려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관련 기사]
▶[알립니다] 더팩트 '모빌리티 혁신 포럼' 26일 개최···참가 접수 큰 호응
▶[모빌리티 혁신①] 이동 패러다임의 전환, 어디까지 왔을까
▶[모빌리티 혁신②] 민·관, UAM 상용화 박차···실증사업 어디까지 왔나
▶[모빌리티 혁신③] PBV가 불러오는 '맞춤형 이동공간'···선박 자율운항도 '가시화'
▶[모빌리티 혁신④] "20년 치 데이터가 무기"···티맵모빌리티, '종합 모빌리티 기업' 정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