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성락 기자] 국내 재계 서열 1·2위인 삼성과 SK를 둘러싼 경영 위기감이 커지면서 두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있다. 이들은 하반기 도약을 위해 글로벌 현장을 점검하고 전략회의를 개최하는 등 새판짜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14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은 약 2주간에 걸친 미국 출장 일정을 마치고 전날 오후 귀국했다. 지난달 31일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한 뒤 바로 출국한 이 회장은 미국 동부와 서부를 오가는 강행군을 이어가며 빅테크 기업들과 차례로 만났다.
구체적으로 지난 4일 뉴욕에서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차세대 통신·갤럭시 신제품 판매 등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10일 새너제이에 있는 삼성전자 미주총괄(DSA) 사옥에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사장 겸 CEO를 만나 AI 반도체, 차세대 통신칩 등 미래 반도체 시장에서의 협력 확대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퀄컴뿐만 아니라 글로벌 팹리스 시스템반도체 기업 경영진과도 연이어 만나 파운드리 사업 협력 확대 및 미래 반도체 개발을 위한 제조 기술 혁신 등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다.
또한, 이 회장은 11일 팔로 알토에 있는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의 자택으로 초청받아 단독 미팅을 가졌다. AI·가상현실·증강현실 등 미래 ICT 산업 및 소프트웨어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12일에는 시애틀 아마존 본사를 찾아 앤디 재시 아마존 CEO를 만났다. 향후 삼성과 아마존의 사업적 협력 관계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키우는 대목이다.
이처럼 이 회장이 강행군을 벌이는 이유는 삼성을 둘러싼 사업 환경이 녹록지 않아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반도체 등 주력 사업은 후발주자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고, 지속 가능 경영 차원의 미래 신사업에 대한 윤곽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특히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의 등장으로 해마다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이 바뀔 정도로 격화하고 있는 '기술 초경쟁' 시대를 맞아 삼성의 글로벌 위상과 미래 기술 경쟁력을 재차 점검할 필요성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장기 출장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현재 성과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해 왔다.
빅테크 CEO와 '릴레이 회동'을 가진 것은 기존 스마트폰, TV, 가전, 네트워크, 메모리, 파운드리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AI 등 첨단 분야에서도 '윈윈'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찾기 위함이다. 이 회장은 이번 미국 출장 일정을 마치며 "삼성의 강점을 살려 삼성답게 미래를 개척하자"고 말했다.
이번 이 회장의 출장 성과는 '글로벌전략회의'를 통해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세트와 부품(반도체) 부문 경영진과 해외법인장 등 주요 임원이 모여 경영 전략을 공유하는 '글로벌전략회의'를 이달 말 개최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회장이 이번 출장을 통해 다진 글로벌 네트워크와 이를 통한 빅테크들과의 포괄적인 협력 노력은 추후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의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최근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에서 예상과 달리 1조원 이상의 재산 분할금이 책정되며 어수선해진 그룹 내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주요 사업 점검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항소심 판결 이후 임직원들에게 "이번 사안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 외 엄혹한 글로벌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사업 경쟁력을 제고하는 등 그룹 경영에 한층 매진하고자 한다"며 공격적 행보를 예고했다.
최 회장은 지난 6일 대만 TSMC 본사를 찾아 웨이저자 회장을 만나는 등 AI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 방문에도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참여해 사업 기회를 모색할 계획이다.
28~29일에는 주요 경영진이 총출동하는 '경영전략회의'를 연다. 최 회장은 현재 사업 리밸런싱(재조정) 작업을 진행 중인데, 이번 회의를 통해 리밸런싱 추진에 속도를 내기 위한 방안으로 'SK경영관리체계(SKMS)'를 꺼내 들 예정이다. 'SKMS'는 고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주도로 1979년 정립된 SK의 경영 철학으로, 최 회장은 경영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룹의 기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최근 삼성과 SK는 정기 인사 기간이 아님에도 주요 사업 수장들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먼저 삼성전자는 지난달 21일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부문장을 경계현 사장에서 전영현 부회장으로 교체했다.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하에서 반도체의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분석이다. SK그룹은 지난 7일 글로벌 성장 전략 실행에 힘을 싣는 차원에서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을 SK이노베이션 신임 수석부회장으로 선임했다. 최 수석부회장이 기존에 맡던 SK온 대표 자리는 유정준 SK미주대외협력총괄 부회장이 채웠고, SK온은 '유정준·이석희 대표 체제'가 됐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과 SK의 최근 '원포인트인사'는 구원 투수를 등판시켜 분위기를 바꾸고, 사업적 반전을 꾀하려는 성격이 짙어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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