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윤정원 기자] 윤석열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동력을 잃는 모양새다. 금융당국은 흔들림 없는 정책 추진의지를 피력하고 있으나 재계까지 공개적으로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높이자 기대감은 한층 얕아진 분위기다. 여기에 더해 수혜주로 꼽히던 저PBR(주가순자산비율) 종목들마저 내리막길을 걸으며 희망을 지워내고 있다.
◆ 재계, 총선 끝나자마자 쓴소리…"지배구조 자율적으로 구성해야"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FKI타워에서 '지배구조, 기업 밸류업 인센티브 기준으로 타당한가'를 주제로 전문가 좌담회를 열었다. 그간 숨죽여 왔던 재계가 여당이 참패한 4‧10 국회의원 총선거 직후 열린 좌담회로, 업계의 관심이 상당히 높았던 자리다.
이날 좌담회에서 전문가들은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이날 좌담회에서 "어떤 지배구조가 우수한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논의와 실증적 검증이 더 필요하다"며 "기업 지배구조는 각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기업의 특성에 맞춰 자율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강조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별로 상황이 다른데 획일적인 지배구조를 인센티브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며 "기업 밸류업 기준에 맞는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이라도 재무 건전성이 낮으면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강원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은 기업의 낮은 수익성과 성장성"이라며 "지배구조를 비롯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 비재무적 요소가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기업가치를 높인다는 (정부의) 주장은 실증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다"고 짚었다.
◆ 이복현 금감원장 "총선은 개별적 이벤트일 뿐"
다만 재계 및 시장의 우려에 대해 이복현 금융감독원 원장은 밸류업 프로그램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복현 원장은 간담회와 같은 날인 15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제40회 대한상공회의소 금융산업위원회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나 "총선은 개별적인 이벤트"라면서 "중장기적으로 밸류업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특정 정당이 됐건 특정 세력이 됐건 우리 자본시장 붐을 일으킴으로써 과거 부동산에 매여 있던 우리 자산운용의 틀이 조금 더 생산적이고 다양하고 건강한 분야로 옮기는 것에 대해 누가 반대하겠는가"라며 "다만 방법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때도, 그 전 대통령 선거 때도 다양한 정당들이 자본시장 활성화와 관련된 의견을 냈다"며 "(밸류업이) 우리 자녀 세대의 자산형성이라든가 노후보장을 위해 굉장히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를 발전적으로 만들자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실 거고, 당국도 일관되게 말해왔다"고 부연했다.
법인세·배당소득세 감면 등 밸류업 프로그램 인센티브에 관해서는 "자본시장에서 취득한 소득에 대해 어떤 형태로 세금을 부과하는 게 공정한지 공론의 장에서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면서도 "기업의 순이익을 볼 때 법인세가 과세가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 부가가치세에 또 과세하는 경우가 있어 배당소득세는 여러 번 과세된다고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 정은보 이사장 "자발적 기업가치 제고 필요"
한국거래소 또한 꾸준히 밸류업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지난 11일 한국거래소는 제3차 '기업 밸류업 자문단' 회의를 개최했다. 기업 밸류업 자문단은 2월 발표된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의 구체화 과정에서 자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 총 12인으로 구성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자본시장연구원이 지난 제2차 회의 결과 등을 반영해 수정·보완한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논의가 이어졌다. 이달 4일 이뤄진 '기업 밸류업을 위한 대표기업(자산총액 10조원 이상) 간담회'를 통해 수렴된 상장기업의 건의 사항을 가이드라인 등에 반영하기 위한 검토도 진행됐다.
아울러 공시·투자지표의 통합 정보 제공을 위한 통합페이지 개발의 세부 추진 방향과 상장기업의 자발적인 공시를 지원하기 위한 공시교육, 컨설팅, 영문번역 지원 방안 등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한국거래소는 이어 15일 외국계 증권사 8곳과의 만남도 예정대로 진행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최근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주식 순매수세가 지속하는 등 한국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해외의 관심과 기대가 높은 상황"이라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우리 자본시장의 변화에 주목하는 만큼, 자발적인 기업가치 제고 노력이 국내 증시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은행‧증권‧보험 하락세…증권가 "정책 추진 약화 가능성"
재계와 금융당국이 불협화음을 내는 가운데 시장은 밸류업 동력 상실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다. 밸류업 수혜주로 분류되는 저PBR 관련 종목들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밸류업 제동 견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저 PBR주로 구성된 KRX 은행, KRX 증권, KRX 보험 등의 지수는 16일 각각 732.43, 673.43, 1721.71을 기록, 모두 전일 대비 하락세를 보였다.
박소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력 약화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세제 개편안의 국회 통과가 불투명해진 상황"이라고 풀이했다. 강대석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여소야대 국면이 유지될 시 정책 추진력에 우려가 발생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한편, 이 원장은 오는 18일 금융투자협회에서 행동주의펀드 수장들과 기업 및 국민연금 관계자들과 '기업과 주주 투자자가 상생하고,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 모색'이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연다. 이날 간담회에서 이 원장은 기업 밸류업에 있어 행동주의 펀드의 역할론을 강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원장은 지난해 2월 22일에도 행동주의 펀드를 포함한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을 소집, "기업의 건전한 지배구조 형성과 주주가치 제고를 우선하는 시장문화 조성을 위해 기관투자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책임있는 의결권을 행사해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